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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이상직 / 호서대학 교수


I. 들어가는 말


이야기로서의 글읽기

이성봉 목사는 자서전, 설교집, 강화집, 그리고 스스로 작사한 성가집이라는 네 형태의 저술집들을 남겼다. 이 저술들을 읽은 독자들은 그것들이 교리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기독교 교육 또는 실천신학에 관한 신학적 논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저술들은 이성봉 목사라는 해설자(narrator)가 일제하의 박해, 해방 후 대립과 갈등의 정치적 상황, 가난과 병마와의 싸움,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의 와중(setting)에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characters) 복음으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킨 사건들을(plot) 설교, 자서전, 극적 강화 및 성가의 형태(rhetoric)로 엮어낸 글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 글들은 나라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백성들, 동족끼리의 전쟁의 참화를 견디면서 가난하고 몸과 마음이 아픈 백성들에게 참 인생의 길이 무엇이며,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며, 그들이 이 투쟁의 와중에서 참고 견디면 어떠한 일이 주어질 것인가를 설득력 있게 호소하는 진실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장차 멸망할 성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천국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이야기이다. 갈래길이 많아 순례자들은 곁길로 빠지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 나오기도 한다. 이 순례의 길에서 인내하고 끝까지 참는 사람들이 결국 승리한다. 실패와 성공, 역전과 새로운 반전의 줄거리 속에서 독자는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이 저술들은 거룩한 부름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부름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심부름꾼이며 "작은 종"이라고 1937년 전국 부흥사로 임명을 받고 전국 교회에 드린 그의 출사표에 밝힌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자신을 돌아볼 때 이 사명의 말씀이 참으로 어려워 미디안 광야의 모세가 내게 거울이 되도다. 그러나 나의 본질을 아시고 택하신 하나님은 "내 권능은 약한 데서 강하니라" 하시며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며 또 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과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시는 것은 옛적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이요 하늘의 새 일인 것을 담대히 믿어 감사하노라.


그의 이야기는 방탕-회개-거듭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됨-(유혹-승리)-성결-(유혹-승리)-영화로 이어지는 거듭 반복되는 주제를 가지고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과거의 잘못된 습관과 죄를 회개하고 변화된 새사람으로 살도록 초청한다. 한마디 덧붙여 언급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목사의 글을 읽을 때보다는 그의 설교와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더욱 큰 감동과 생동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 영적 감화력을 매우 강하게 체험하였다.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글읽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쉽다.



II. 이성봉 목사의 이야기 신학의 구조



이성봉 목사를 이야기 신학자로 규정하고 그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해설자, 배경, 줄거리, 등장 인물, 수사학이라는 다섯 개의 특징들을 이용하여 그 이야기를 분석해 보려고 한다.



1. 해설자(Narrator)

해설자는 이 목사 자신이다. 그는 저자이면서 동시에 해설자로 등장한다. 이 목사는 자신의 주관적 체험과 관점을 숨김없이 써내려 갔다. 그는 역사(history)적 사실들의 서술이나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본 이야기(story)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들을 성경과 교회 역사를 통해 나타난 객관적 사실들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관점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며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1) 해설자의 역할

작품 중의 해설자는 꼭 저자 자신일 필요는 없다. 마가복음의 경우 저자는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지 않고 암시적인 해설자를 내세워 사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비하여 이 목사의 저서들은 해설자와 저자가 일치한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동시에 해설자와 저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해설자는 이 이야기에서 일인칭으로 나타나서 주어진 상황과 공간 안에서 목격자로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설명하고 소개한다. 자주 해설자는 자신의 약점을 들추어낸다. 그는 본래 불학무식했고 술주정뱅이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있다. 그는 병에 걸려 죽을 뻔한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병을 이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듣고 읽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동참하도록 호소한다. 해설자는 비록 눈에 보이는 어떤 일들이 잘못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을 믿는다. 이것은 "상대적 입장"에 서지 않고 "절대적 입장"에 서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환경과 주위를 보면서 원망하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것이 이 목사가 말하는 절대적 입장이다. 해설자는 인간의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믿는 절대적 입장에 설 수 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자기가 손해를 보고 있으나, 모든 것이 결국 선을 이루게 된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감사하는 신앙이 절대적 입장이다.



2) 해설자의 관점

해설자는 교회와 신자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판단적인 입장을 취한다.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해설자의 직접적인 언급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교회를 향하여서는 교역자를 박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그리고 교역자 자신에 대하여는 게으름을 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또한 오늘날 사랑이 없는 교회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날 교회 내부를 보면 이상야릇한 비루한 일이 많다. 성공자는 성공자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옷 잘입은 사람은 옷 잘입은 사람끼리, 학식 있는 사람은 학식 있는 사람끼리 서로 친하고 서로 몰려가고 몰려오고 서로 모여 앉고 서로 악수하고 서로 주고 서로 받고 한다.


그는 철두철미 가치 판단에 근거한 태도를 가지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부흥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제 해설자는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판단 기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새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며, 반대로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은 옛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 새사람의 일
마귀의 일, 옛사람의 일



회개

믿음

절대적 입장

기도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

인간 가운데서 작은 자가 된다

다른 사람을 섬김

하나님만 신뢰

이웃뿐 아니라원수까지 사랑함

타인을 위한 양보의 삶


회개하지 못함

불신앙

상대적 입장

게으름과 영적 나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음

높은 자리를 탐함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좋아함

자신의 이익에 충실

자신과 자기편을 편애

자신과 자기편의 이익 추구








해설자의 이 관점은 이 목사의 저서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3) 해설자의 문장 스타일과 속도감

해설자가 사용한 문장 스타일은 통속적이며 구어체의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고 있고, 필요할 경우 한문을 조어하여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천로역정 강화]에 나타난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귓구멍이 넓은 사람은 천성 가기 어렵다.

이 사람이 이렇다면 이럴 듯하고, 저 사람이 저렇다면 저럴 듯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무정견한 무골충 같은 사람은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늘나라에서 요구하는 인물은 의지가 돌같이 강하여 대소사에 맘이 뜨지 않고 어떠한 문제든지 일정한 의견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해설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사건을 묘사하여 그 말을 듣고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유도한다. 어떤 경우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며 어떤 때는 몇 가지 이야기를 삽화처럼 끼워 넣어 쉬어가면서 결단하도록 유도한다. 한마디로 이성봉 목사의 해설은 명상하면서 평화롭게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과 갈등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예수님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떠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느끼게 된다. 중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은혜 주실 때

1. 성도들아 이 시간은 은혜 받을 기회로다

허락하신 성신 역사 우리 위에 임하셨네

기회로다 이 시간은 은혜 받을 기회로다

믿읍시다 받읍시다 이후 기회 믿지 마라




그러면 내일, 요다음, 차차라는 말은 마귀 "총회"에서 가결된 명안이다. 많은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 하면 예 차차 믿지요, 다음에 가지요 하는데 내일, 요다음, 차차 하다가 마지막에 아차 하고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4) 해설자의 이야기에 나타난 문학적 특징들

해설자는 매우 정교한 문학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첫째, 반복적인 용어의 사용이다. 매우 빈번히 반복해서 사용하는 언어는 "임마누엘", "부흥", "회개", "사랑", "기도", "성결", "신유", 및 "재림" 등의 단어들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 "하나님의 자녀," "생명 체험자," "천국 가는 길에 갈래길이 많음으로," "살았느냐, 죽었느냐" 등 반복해서 강조하는 구절들도 쉽게 눈에 띈다. 이들 반복되는 단어나 구절들이 익숙해지면 독자들은 쉽게 해설자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6·25 사변이 끝나면서 해설자는 두드러지게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전쟁 용어를 선택한다. "특공대", "대장 예수", "점령 5일간", "고지 점령", "재토벌" 등 그 당시 사람들이 익숙한 전투 용어를 사용하여 복음을 효과 있게 증거하는 기민성을 보였으며, 악의 세력과의 싸움이 쉬운 놀이가 아니라 생사를 건 전투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둘째, 짧은 예화들을 중간에 삽입하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천로역정 강화]에서 해설자는 천국 가는 여러 경로를 설명하면서 전도 과정에서 직접 경험한 짧은 에피소드들을 삽입하여 그 장면의 감동을 매우 효과 있게 제시하고 있다.

생명의 면류관

이는 곧 진충의 열매이니 생명의 면류관이다……진충의 거룩한 죽음이 미도를 낳은 것이다.

만주 명월구 교회에 있던 이원호 장로의 간증을 들으면, 그의 부인이 독실한 신자였는데 지성으로 자기의 불신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고 권면하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운명시에 혀는 꼬부라지고 입술은 타서 말은 못하고, 그 남편을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남편은 무슨 유언이나 하려는 줄 알고 귀를 들이대었더니 뜻밖에 죽어가던 아내가 정신이 나서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귀를 쥐고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한참 쑤셔 놓고 운명하고 말았다.

그 남편은 무섭기도 하고 일변 이상하여 "이 사람이 죽으면 죽었지 왜 남의 귓구멍은 쑤셔 주는가? 오! 깨달았다. 내가 너무 귀가 막혀 신령한 음성을 듣지 못하니 귀 좀 열어 들으라고 하는 일이로구나" 하고 죽은 시체를 부둥켜안고 대성 통곡했다고 한다……회개하여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지금은 훌륭한 장로로 교회의 일 많이 하는 중이다. 진충의 죽음은 이러한 것이다.


셋째, 해설자는 3, 4, 5, 7 등 중복해서 강조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구원의 세 단계", "부활하신 주님의 5대 역사", "능력 있는 기도의 7대 조건", "사중복음", "주님 최초 설교의 4대 강령", "신자의 3대 강령" 등 기억하기 쉬운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구조들 속에는 시간의 삼중 구조(과거-현재-미래)를 반영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넷째, 악의 세력이 던지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이야기의 전환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목사는 6·25 때 목포에서 목회를 하던 중 피난을 가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가 공산당에게 잡히게 되어 많이 얻어맞게 되었다. 옥중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다가 빨치산 대장에 의해 끌려나가게 되었다. 이제는 총살을 당하게 되었구나 생각하면서도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사랑으로 인사하였다. 그리고 심문을 당하면서 그는 대화를 시작한다.


"예수는 왜 믿소?" 세례 문답으로 묻는다. "당신들은 사회를 혁명하지만 예수는 자아를 혁명하는 것이오……우리 나라가 복을 받으려면 우나 좌나 정치적으로보다는 먼저 우리 민족의 양심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양심은 얼마나 바로잡았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양심은 바로잡았소."


질문과 답변은 드디어 천당의 존재 문제까지 이르게 되고 천당 지점이 해설자의 마음에 이루어졌으니, 본점이 분명히 있을 것으로 믿어 천당이 있다는 점을 설파한다. 지점이라는 말에 빨치산들은 웃음보를 터뜨린다. 그리고 그 대화는 해설자 개인만 놓고 볼 때 협박으로 시작하여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전도사 한 사람과 해설자만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다섯째, 해설자의 탁월한 해학은 이야기의 묘미를 한층 배가시켜 준다. 해설자는 조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한순간도 그의 말과 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처럼 해설자는 생각하였다. 유머는 이러한 목적에 유용하였다. 그러나 유머의 참 목적은 함께 웃음으로 장면의 극적인 전환을 꾀하고자 함이었다. 위에서 기술한 대로 그의 유머 감각은 그를 사지에서 구해준 한 요인도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적 정서인 해학을 하늘나라 이야기에 도입할 수 있도록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해도 무초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부종과 고열로 집회를 중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민간요법에 따라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땀을 내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만 두어라. 하나님의 종이 개가죽을 쓰다니, 나는 어린양 예수를 옷 입듯 하였다" 하고 참고 기도할 때에 신기한 이적이 나타나 그 밤으로 거짓말같이 나아서 그 집회를 승리로 마쳤다.


해남에서 급성 맹장염으로 의학적 소견으로는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을 지 모른다는 진단이 나왔다. "아이고 그만두소. 나 죽으면 하나님 손해 나지 나 손해 나겠소? 그만 이대로 주님께 맡길랍니다." 그는 결사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 해학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를 치료하셔서 그 집회를 큰 은혜 가운데 마칠 수 있도록 하셨다. 무모하리만큼 순수한 신앙은 해학과 함께 기적을 창출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응어리진 가슴을 후련하게 했던 해학의 묘미를 이 해설자만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이외에도 성경 인용을 통한 이야기 전달, 앞에서 설명한 "상대적 입장"과 "절대적 입장"의 대비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 사상으로 인도하는 열려진 체계는 그를 탁월한 이야기 신학자로 분류할 수 있게 한다.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원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을 점하고 있으며, 아무리 역경과 고난이 와도, 그리고 잠시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를 소망 중에 바라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 이성봉 목사가 내린 그의 이야기의 결말이다.




2. 무대 배경들(Settings)

이야기의 배경들은 매우 중요하다. 배경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창출하고, 갈등의 여건들을 제공하고, 무대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특징을 드러내고, 심지어 이야기의 주요 주제를 포함할 수도 있다. 배경들은 우주적 무대 배경, 사회적 무대 배경, 전도 여행 장소, 시대적 상황 등을 고려할 수 있다.



1) 우주적 무대 배경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지만, 해설자에 의하면 이 세상은 악과 선이 공존하고,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투쟁하고 있는 곳이다.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넘어뜨릴 자를 찾아 우는 사자같이 울부짖고 다닌다." 이 세대는 믿음이 없는 세대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왔고, 예수님의 능력 가운데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다. 우리는 자다가 깨어 기도하고 새 힘을 얻어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이 때를 놓치면 영영 그때를 만나지 못한다.


한국교회여!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이다. 구원하실 날이다. 주께서 일하고 은혜를 주실 때에 믿음의 입을 크게 벌려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다시 우리 앞에 열린 문이 닫힐까 두렵다.


재림의 날이 가까이 온 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설자는 거듭거듭 경고한다.



2) 사회적 무대 배경

이성봉 목사의 활동 시기는 일제 식민지 시대, 만주에 가서 전도하던 시기, 해방 후 좌우익의 싸움에 이어 공산당의 침입과 전쟁, 세속화의 물결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세계로 눈을 돌려 미국에 가서 전도하던 시기 등으로 분류된다. 이 시기는 나라를 빼앗겼던 민족이 고통을 당하고 신사참배와 배교의 가능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면서 위로를 찾던 시기이다. 해방 후에는 정치, 문화적으로 혼돈과 싸움이 계속되고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던 시기였다. 가난과 절망이 가득 넘치던 시기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치료하시고 새 힘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힘있게 해설자는 증거하였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힘있게 전파된다. 이성봉 목사는 황주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설교를 한 후 사리원 경찰서에 잡혀가서 모진 매를 맞고 쓰러진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호시라는 형사부장, 그의 후임자, 그리고 경찰서장이 연달아 죽어 나가고 검사, 그의 마누라, 장모가 중병에 걸린다. 이성봉 목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아무리 어려운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복음은 승리하고야 만다는 산 체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들을 통하여 고난과 역경 가운데 신음하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선포하고 위로한 것이었다.

해방 후 이념 논쟁의 와중에서 그는 좌·우익을 뛰어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한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자신이 받은 사례비를 희사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갔다.


특수한 일은 나환자들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저들을 동정하여 남한에 있는 나병원 교회는 대개 안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동리에서 버림받고 병으로 몸이 썩고 문드러지는 비참한 그들을 동정하여 찾아가서 복음을 줄 때 진정한 사랑, 참된 신앙의 무리는 그 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해설자는 본래 남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처럼 생각하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나무라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아를 이용하여 치부하는 사람들을 "자선이란 미명하에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위선자들, 고아의 피를 빨고 노쇠의 기름을 짜는 자"라고 준엄하게 책망한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고 과부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주의에는 사회 참여의 신학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사회 참여의 신학이 없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자로서 영혼 사랑, 교회 사랑을 일관되게 실천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만일 진보주의자가 자신이 진보라고 하면서 기존의 특권을 보수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는 진보주의자로서의 일관성을 잃게 된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자가 정경 분리를 주장하고 초연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잘못된 정치에 협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 그 또한 일관성을 잃게 된다. 이성봉 목사는 이러한 함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세속 정치뿐 아니라 교단 정치조차도 자신의 사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해방 후 그에게 맡겨졌던 서울신학교 이사장직도 일년을 견디지 못하고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은 초지일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라고 믿고 실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대적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성경적 실천가였다. 그의 이야기는 이러한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다만 그것은 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의 행적과 희생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의 주제가 된 것이다. 이야기꾼이 다른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주제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인데 이성봉 목사는 이미 그러한 영광을 받고 있다.



3) 전도 여행 경로

그의 이야기는 국내, 만주, 일본, 그리고 미국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그의 전도 여행은 천성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길을 걷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며 그의 설교는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고 권고한 것이다.

그에게는 인위적인 국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울타리가 되어주는 주거지가 있을 뿐이다. 이생의 모든 행로는 천성으로 향하여 가는 순례의 행로일 뿐이다. 이 '순례자 의식', 이 의식이 그를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의 신앙에 입각하여 철저히 살게 했다. 그는 강원도 산골짝에 갈 때, 남해 바다의 고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미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남이 가기 싫어하는 곳에 가려고 하는 빚진 자의 마음으로 실천했다. 그는 심지어 "새 시대 남북 통일을 위한 전도 훈련과 작전 계획으로" 오지에 가서, 약한 교회에 가서 전도하기로 결심했다.

강원도, 섬, 소록도, 고아원, 미자립 교회 등으로 대표되는 이 전도 여행의 경로는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며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이방인의 길이다. 그 길을 통해서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밝힐 수 있고, 드디어 남북 통일의 대망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선언은 선지자의 예언이다. 그 예언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만 모여든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고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3. 줄거리(Plot)

이성봉 목사의 이야기 신학의 주요 줄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과 그 세력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영혼의 구원과 교회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구령과 교회 부흥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으로 자각하고 있다. 한마디로 영혼 사랑, 교회 사랑의 정신이다. 그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큰 교회, 작은 교회, 도시 교회, 농촌 교회, 군 막사, 학교, 나환자촌, 고아원, 국내와 국외 등 가리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이 전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처럼 생각하고 전도하였다.

특별히 그의 전도집회는 교회 부흥이라는 전략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그의 전도집회의 가장 큰 관심이었다. 새로 믿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믿는 사람들의 회개와 자각도 중요하다. 특별히 지도자의 영적 부흥이 더 중요하다. 교회가 잘되면, 지도자가 깨어 있으면,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히 있으면, 교회 부흥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도덕적 문제와 각종 사회 문제들도 해결할 길이 열리게 된다. 교인들이 먼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 감화력이 약화되고 그 결과 이 민족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것은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자'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과 유사한 생각이다. 이 목사는 목회자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리하여 목회자들의 영적 상태의 부흥을 많은 힘을 기울여 촉구한다. 교회 내의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영적 함정이 있다. 그러나 죄에는 타협이 없다. "유력한 교직자와 충성하던 신도들이 무수히 타락하는 것을 볼 때 과연 택한 자라도 미혹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리란 말씀 그대로이다." 미혹받은 거짓 지도자는 외식하는 태도, 회개 없는 은혜 체험, 성경에 어긋나게 잘못 가르치는 교리, 의로운 생활의 열매 없이 파당을 조성하는 행위, 그리고 회개하지 못하는 거짓으로 알 수 있다. 이 목사의 최대의 관심은 지도자들이 먼저 깨어서 열심을 품고 양떼를 인도하는 교회 부흥, 지도자 부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구원의 세 단계를 말한다. "과거적 구원은 죄악의 형벌에서, 현재의 구원은 죄의 지배에서, 미래의 구원은 부활 완성 영생이다(빌 3:10-16)." 이것이 이성봉 목사의 이야기의 줄거리를 구성하고 있다. 구원은 끊임없는 싸움이요 전투이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싸움에 나서도록 촉구한다. 이 싸움을 피하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밖에 없다.



첫째, 구원은 우선 죄와 그 지배자와의 싸움이다. 이야기의 해설자는 젊었을 때 목회 초기의 자신의 경험을 매우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 싸움은 무려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고,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참 십자가를 보고서야 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사탄과의 싸움이었고, 그의 죄에 대한 사탄의 고발과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철저한 회개와 믿음, 그리고 예수님의 은총으로만 이길 수 있었다.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고백과 회개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의 장엄한 출발이다. 이 싸움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한다.


둘째, 죄의 지배에서 구원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죄의 지배는 끈질겨서 택한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한다. 이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기도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운동은 교회와 성도의 심령의 부흥의 원천이다. 이 때의 적은 가까운 친구나 가족일 수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일 수도 있다. 예수님을 오해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적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교회 밖과 안에 모두 우리를 유혹하는 세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부흥에도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이 있다. "참 부흥은 죄와 허물을 깨닫고 그 심령에 수치를 느끼고 변화되어, 희열로 산 그리스도를 모시며, 그 심령은 소망을 하늘에 두고 달음질하며, 은혜가 다른 사람들에게 파급되고(행 2장), 성결의 기갈과 만족을 느끼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리스도의 용사로서 지원병이 된다." 반면에 "거짓 부흥(유 4-19절; 행 19:14-16)은 죄에 대한 통회가 없고, 성결의 무관심, 천박, 피상적, 기분적, 감상적이며, ……생명의 운동이 없다. 일시적이요 영속성이 없고 공허감을 느끼다가 절망에 빠진다."


셋째, 구원의 셋째 단계는 마지막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그 영생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 안에 이미 와 있다. "천국의 본점은 본 적이 없으나, 내 맘에 천국의 지점이 이루어진 것을 보아서 나는 천국이 있다고 믿소"라는 해설자의 고백은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설명해 준다. 이 마지막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이루어지며, 그 기다림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을 재해석하고 주님 오실 때에 기뻐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삶이다. 여기에 종말 신앙이 미래에서 현재로 침투해 온다. 이성봉 목사의 유명한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란 말은 이러한 영생이 현재에 침투해 들어와 우리에게 산 믿음을 주시는 그 사실을 웅변해 주고 있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에 근거한 이야기 신학은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이 신앙 정신은 성경과 종교개혁가,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의 주요 주제가 되고 있는 자기부정의 원리에 기초한 십자가 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적 주제가 될 수 있는 정신이다. 모세, 바울, 루터, 그리고 본회퍼, 몰트만 등으로 이어지는 자기부정의 원리에 기초한 십자가 신학은 이러한 전통에 서 있다.

십자가 신학을 뒷받침하는 자기부정의 원리는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자신과 스스로가 속한 공동체의 고정 관념과 사상을 철저하게 해체(deconstruct)하는 이론적인 면과 거짓, 위선, 폭력을 끝까지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는 실천적인 면을 가진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자기부정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성경은 모세의 자기부정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세의 철저한 자기부정의 신앙을 이보다 더 잘 웅변해 주는 곳은 없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대면한 선지자였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에스더의 너무나 유명한 말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밀알이 죽지 않고서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부정의 원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자기부정의 원리는 파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라는 수단을 통하여 새 인간, 새로운 관점을 탄생시키는 삶의 방식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말씀 속에서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계심을 본다. 물론 이 때의 동일시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동일시라고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건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사건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자기부정의 신학은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로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스스로의 생명을 주심으로 자기부정의 신학, 십자가 신학의 완성을 이루신다. 바울의 자기부정의 신앙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자신이 그리스도와 끊어질지라도 동족이 구원을 얻기를 기도한 바울의 심정은 한마디로 십자가 신학의 모범적 사례이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의 요체는 십자가 신학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약함과 고난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십자가 신학은 루터가 재발견한 성경적 진리이다. 십자가 신학은 영광의 신학과 대비된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의 업적 가운데서, 그리고 자연의 광대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약함과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용서하시는 그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에 와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와 몰트만은 십자가 신학을 되살렸다. 본회퍼는 옥중에서 보내는 서신을 통해 매우 의미심장하면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자신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약하시고 무능력하시다. 그 길만이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하심과 숨으심 속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그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십자가 신학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중시한다.

이성봉 목사의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의 신앙은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요청과는 물론 다르다. 이성봉 목사는 세속화 시대라는 본회퍼의 명제를 깊이 반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서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순교자적 자기부정의 신학을 발견하고 철저히 실천하였을 뿐이다.

또한 그는 영광의 신학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과 연결시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즉 자기부정을 통하여 긍정에 이르는 과정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에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과 전망을 주시고 우리의 생명도 풍성하게 하신다. 그는 자기부정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은 사례들을 풍부하게 예시하고 있다. 본인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도우심을 치유의 은사 가운데서 체험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교회가 부흥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는 일제 시대 감옥에 갇혀 매를 맞다가 매를 때린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통해 체험한다. 6·25 때 공산당의 패퇴는 그의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그는 감히 진술한다. 그에게는 영광의 신학도 중요한 신학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는 영광의 신학이 없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No Cross, No Crown"의 정신이다.

이성봉 목사는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며 그날이 매우 가까이 왔음을 믿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시한부 종말론을 매우 강경하게 비판한다.



어느 장로는 몇 해 전 11월 25일에 온다고 야단법석이었다. 또 지금 삼각산에 있는 어느 노인은 주후 2023년에 온다고 아직 한 70년 남았다고 한다. 또한 김제에 갔더니 5월 24일에 오신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런 소리 곧이 듣지 말자. 그것은 마귀의 소리이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그날과 그 시간을 아신다. 우리는 그날이 가까웠음을 믿고 하나님 앞에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재림의 날짜와 죽음의 날짜를 하나님께서 감춘 것은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고, 근신, 진실, 사랑, 봉사, 그리고 나그네의 띠를 띠고, 말씀의 등불을 켜서 세상을 비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성봉 목사는 전천년설 등 교리적 논의는 자제한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신학적이라기보다 실존적이고 긴급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종말론적 신앙은 종말의 빛에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잘못된 점을 고치고 회개하는 결단이다.



4. 등장 인물들

이성봉 목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세력,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 그리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이렇게 세 부류로 되어 있다. 박해자는 오히려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 문제이다. 특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불법이 성하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다.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애정이 식어진 교회는 도리어 남의 길까지 막게 된다. 애정이 식어진 교회들이 하는 일은 모두가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아서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는 고사하고 사람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는 것밖에는 더 하지 못한다.

현대 교회는 다른 것을 염려할 것 없다. 먼저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의 열을 뜨겁게 하는 것이다.

깨어서 기도하고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 이야기는 촉구하고 있다.

해설자 자신은 한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힘입어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를 깨우는 소중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특수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엘리야와 같이 모세와 같이 하나님이 귀히 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III. 수사학(Rhetoric) 및 나오는 말



수사학이란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의 구성 요소들 전체를 종합하여 듣고 읽는 독자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남겨 놓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다. 즉 독자들이 이성봉 목사가 남겨준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발전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로 풀어갈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점을 한국교회의 현재에 맞추어 풀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놀라운 발전을 허락하셨다. 교인 수와 지도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질적 변화의 속도도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몇 가지 제도적인 문제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교직주의(clericalism), 교파주의(denominationalism), 기복 주의, 그리고 실천 없는 신앙 지상주의(anti-nomianism)의 문제들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정체 상태에 들어가고 있고 영적 정화 능력이 위협받고 있다.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의 정도를 걸으셨던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이 문제들을 해결할 처방전을 구하고 싶다. 그 처방전은 한마디로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의 신앙 정신이다. 이 신앙 정신은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도 유효한 신앙정신임에 틀림없다. 일사각오의 신앙 정신, 순교자 신앙 정신, 썩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밀알의 신앙 정신으로 영혼 구원과 교회 부흥을 일구시던 이 목사님에게서 21세기 한국교회 부흥을 위한 비전을 찾고자 한다.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교직주의, 교파주의, 기복주의, 그리고 실천 없는 신앙 지상주의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난 2천년 동안 가톨릭 교회를 괴롭혀 오던 문제는 교직주의(clericalism)라고 말할 수 있다. 교직주의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성직자를 신분적으로 평신도보다 상위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성직자의 중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성직자가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독점한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교직주의는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했다.

"만인 제사장설"이란 사제만이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 나타난 제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히 7:27; 9:25, 26; 10:11, 12), 특별 계급으로서의 제사장이라는 교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자라는 직무 개념으로 바뀌었다(마 16:24-28). 목사나 교사뿐 아니라 다른 모든 신도들도 거룩한 성도들이며 성직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며 한 형제 자매이다. 계급적 상하 개념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불필요하다.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일수록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가장 작은 자 하나가 예수님과 동일시되기도 한다(마 25:40). 이것이 종교개혁가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만인 제사장 직무와 관련된 정신이다. 그러나 16세기초에 시작된 이 개혁 운동은 다시 좌초하기 시작하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높은 자, 섬김을 받는 자로서의 목사상이라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로 양분된 계급 개념이 교회 내에 스며들고 있다.


둘째, 교직주의가 가톨릭형 비리라면, 교파주의(denominationalism)는 개신교형 비리이다.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가 밝힌 대로 미국에서 번성한 교파주의는 인종적,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차이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화시킨 세속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미국의 이러한 교파주의가 한국교회에 직수입되어 한국교회를 분열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같은 신학과 같은 근원에서 나온 교회들까지 수십 개로 갈라져 정치적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복음과는 거리가 먼 죄이다. 한국의 교파주의는 미국의 인종적, 사회 계층적 편견 대신 지역 차별을 첨예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 한국의 고질병인 지역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차별 문화의 포로가 되고 있다. 교파주의의 극복 없이는 지방색의 극복도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셋째, 기복주의(祈福主義)는 한국교회의 자생적 특성이다. 샤머니즘, 즉 무교의 영향을 받아 기복주의로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미신과 그 정신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영향을 받아 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교에서 행하는 큰굿은 열두 거리로 구성되는데 그 핵심은 재숫굿 즉 재복을 비는 대감거리, 수복을 비는 제석거리, 집안의 평강을 비는 성주거리이다. 곧 굿의 중심 목적은 제액을 물리치고 부자 되어 장수하며 평안을 누리고 잘 살자는 데 있다. 말하자면 초월적 가치의 세계라든가 인격적 또는 윤리적 가치의 세계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교라 하겠다. 성경에도 물론 축복 사상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적인 축복 사상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를 전제하고 있다. 반면에 샤머니즘적 축복관은 복을 받는 다는 사실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분히 이타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축복관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물량주의에 빠지고 사회적 봉사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넷째, 신앙 지상주의(antinomianism)는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도덕 폐기론적 신앙관을 말한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및 주일과 평일의 이중적 잣대로 인하여 지탄받는 신앙인들이 있음을 볼 때 잘못된 신앙관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을 영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도덕적 해이에 빠지는 현상이 신앙 지상주의이다.


이 네 가지 과제를 극복해 가는 한국교회의 이야기를 앞으로 써내려 가야 할 것이다. 이성봉 목사의 이야기는 열려진 이야기로 끝난다. 그 나머지는 우리가 써야 할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한 교회 부흥의 신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신학은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되어 또다시 우리의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승되어 갈 것이다.

연구논문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
9.
이성봉의 성서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좌 담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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