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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聖鳳 牧師의 復興運動 再照明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기조강연)  

閔庚培(전 연세대 교수)


1. 서론

이성봉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훌륭한 부흥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연구가 그 어간 많이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초교파적인 공개 강연의 성격으로 그의 신학과 부흥운동을 다시 밝히게 된 것은 한국교회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 치가 그만큼 뚜렷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설교나 부흥운동에 대한 자료가 총서 형식으로 다섯 권 간행된 것 이 있으나, 자신의 원고에서 정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육성 전달에 미비가 눈에 띄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만한 정도의 자료 보관은 한국교회에서는 손꼽힐 만한 것이라 여긴다.

그는 한국이 일제 치하 그리고 다시 6·25 전란의 가시밭길을 가던 시련기에 이 민족의 구원과 교회의 사역 그리고 위로와 소망을 선포하기 위하여서 보내어진 하 나님의 사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날의 아픔을 견딜 수 있는 복음의 사역을 다하고 간 것이었다.



2. 이성봉목사의 역사적 위치


이성봉목사는 한국교회 부흥사(復興史)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시련기 곧 일제 말기의 고난과 해방, 6·25를 잇는 형극(荊棘)의 시대에 주로 활동한 점이 그 하나요, 교회부흥운동을 전국적으로 수행 하면서도 주로 작은 교회들, 그리고 특수 집단, 곧 군진(軍陳)이나 경찰서, 구치소 및 한센병원이나 양로원과 같은 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 그 다른 하나이다. 사 실 그는 한센병원 교회에는 전국 어디나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메시지는 회개(悔改)와 거기서 얻는 깊은 감격에 중점을 둔 아주 소 박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그의 삶의 골수에서 솟아난 산 경험의 감격으로 차 있어 서 그의 설교에 자작 찬송이 그렇게 많이 불려져 있었다는 것이 달리 눈에 띄인다. 그에게서 그 시대적 배경의 살벌함에도 불구하고 말세론적 비관이나 그 신경과민의 징후가 전혀 없이 경세적(經世的) 일상 생활의 정상을 전제로 수행된 곳에, 한국교 회 전체를 망라하는 민족 신앙의 한 현상을 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런 것이 그 에게 높이 빛나는 건전한 신앙 부흥의 요소로 회고된다. 그는 가난과 압제의 민족 교회를 골방과 은둔의 개인주의적 신앙에로 인도하는 모든 가능한 시험을 이기게 하였으며, 오히려 청청 백일의 광명한 신앙으로 이끈, 보기 드문 한국교회 전진 신 학의 위대한 전위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부흥의 물결에 휩 쌓이던 시대의 큰 흐름 안에 있으면서도, 묘 하게도 그의 소속교회인 성결교회나 다른 교단 인사들과의 접촉이 그 자신의 글에 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그런 비교적 외로운 길을 간 것이 눈 뜨인다. 그것은 그가 달리 이들과의 신앙적 격리를 의식하였다든가, 아니면 기존 교회에 대한 신령주의 적 비판의식 때문에 그렇다는, 그런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다만 스스로 한 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서 따로이 하나님이 사역하신다는 확신에 따라 외로운 길을 달려간 것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긴 부흥운동의 커다란 산맥에 합류하여 있어서 우리 교회 전체 부흥운동과의 공통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길선주(吉善宙), 김익두(金 益斗), 이용도(李龍道), 정남수(鄭南洙), 그리고 이성봉목사로 이어지는, 거봉(巨峰)의 하나로 우뚝 솟아 있다. 그것은 바로 성서 중심성, 기도의 능력에 대한 소박한 신 뢰, 그리고 능력의 복음 전파 언어들, 이런 것들이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언어 에는 조리(條理)가 그 자랑이 아니었다. 그 날카롭고도 때로 위협적인 예언자적 선 포, 일반 백성들의 거리의 구수한 토속적인 언어, 그리고 찬송과 기도를 설교 도중 에 엇섞는 굴곡과 상하의 리듬 편성, 그런 것들이 넘쳤다.

이런 요소들이 한국교회 목회에 그 예배 형식으로 굳혀진 사실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한국교회 신앙 형태 구성에서 이들이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였다. 한국 교회가 부흥회적인 교회 형태로 굳혀진 까닭이 여기 있었다.



3. 이성봉의 생애와 그 신학의 형성


3.1. 인간의 신학


이성봉목사는 스스로 그 가문과 그 집안에 대하여 솔직하게 그 어려웠던 일들과 아팠던 일들을 그대로 털어놓아 숨김이 하나도 없다. 그 가문도 "이렇다 할 가문이 못된다"는 회고를 한다. 그리고 그 가정의 불행이 부모님들에게 있었고, 그들 사이 에 애정 없어 정이나 의가 없이 산 날들을 글로 써서 천하에 알린다. 그래 그 어머 니의 자살 기도 두 번이 가져다 준 마음의 상처를 그는 일생 가슴에 삭이고 살게 된다. 더구나 그 집안의 경제적 궁핍은 "너무 빈곤하여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 을 하였다"고 밝힌다. 그런 질고와 불행 그리고 환난의 집안에서 그는 1900년 7월 4일의 평안남도 강동(江東)에서 태어난다.

그가 이러한 가정의 불행을 대서특필하는 까닭이 있었다. 1906년부터 그의 집안 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리고 거기 일대 변화가 일어나 그 가정에 "기 쁨이 충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를 그 가문에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평양 근처의 중화(中和) 에 이사하고, 그리고 거기서 40리(里 -약 1,600 킬로 메타) 떨어져 있는 평양의 선 교리 감리교회에 주일이면 새벽부터 걸어서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곤 하였 다.


주일이면 우리 어머니는 닭 울기 전에 일어나서 새벽 조반을 지어 우리를 먹 이고, 동생은 업고 나는 걸어서 혹은 아버지의 등에 업히기도 하며 그 머나먼 40 리 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집안은 평화가 깃들고 아주 단란한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기독 교 신앙의 거대한 변화의 힘을 그는 이렇게 실제로 몸소 경험하고 그 변혁력에 대 한 믿음을 확고히 가질 수가 있었다. 이런 실존적 체험의 길을 거치지 아니한 신앙 의 호소력은 그에게서 일생을 한 순간도 예외 없이 복음의 압도하는 힘을 선포하는 강력한 복음의 선포자로 살아가게 한 근원과 배경이 되었고, 따라서 그의 부흥운동 은 실로 자발적인, 멈출 수 없는 생의 길이 된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고와 교육으로 기도 생활에 몸을 던지고 아울러 성경 읽기에 전심하여 여섯 살의 나이에 신약성서 일독(一讀)의 기록을 세운다. 7세 때 에는 교회에서 공중 기도도 하고, 성탄절 같은 때에는 독창이나 연설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였지만, 신앙과 인간의 문제는 경화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린이로서의 어린이다움을 왜곡하고 과장하여 신앙의 완벽을 말한 일이 없었 다. 그는 어린이로서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이다운 장난기라든 가 자유분망 그리고 유아 소년기의 활달함을 그대로 기록에 남겼다. 아버지의 돈지 갑을 엿보았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그는 기록에 남긴다. 이렇게 해서 그의 소박한 진실이 들어 나게 하여, 신앙이 우리 일상의 생활이나 인간성의 표현과 격 리된, 그래서 범상한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실체로 저 멀리 세워두는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그의 복음의 핵심은 완전과 성결의 결백이 아니었다. 죄 없이 맑은 것, 그것이 그의 관심이 아니었다 진실, 그 회개의 자세가 중요하였다. 그의 한국교회 사상의 특이하교도 고귀한 공헌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는 죄의 회개의 축복과 기 독교성을 대서특필 계속 반복한다. 심지어 죄 없음을 외치지 아니한다. 죄의 참된 회개, 그것을 그는 일관되게 외치다가 간 것이다. 회개가 천국 가는 길인 것이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가는 것입 니다.


그의 이러한 신학에는 인류가 본래 원죄(原罪)에 얽매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 다.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로 양심이 무뎌지고 죄로써 품성이 나빠져서 그대로 하나님을 떠났으며,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좋은 의식을 잊어 버렸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고, 이것은 타락이전설(Supra-lapsarianism)의 오류를 극복하는 그의 웅대한 신학이다. 이런 신학은 성결교의 가능한 신학적 완전 주의를 사전 격리하는 그의 자생적 확신인데, 물론 그것은 그의 철저한 성서적 신 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성봉목사의 모친은 김익두(金益斗) 목사와의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 천(信川)에서 목회하던 김익두 목사의 청빙으로 그 곳 경신소학교의 교원으로 가서 3년 가량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사뭇 지적(知的)이고도 신실한 여자였던 것으로 믿 어진다. 이성봉목사 역시 그 학교를 1914년에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그는 몹시 몸이 약하였고 폐지스토마오 고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김익두목사와의 신앙적 인연이 굳혀진 것이다. 김익두목사는 대단한 설교 가로 이성봉목사가 어린 나이인데도 그와 같은 설교가가 되었으면 하는 꿈을 가지 게 한 분이었다. 한국교회는 당시 김익두목사의 부흥운동에 다들 크게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김익두목사는 실로 한국교회의 세기적 발전을 실현시킨 놀라운 성령 역 사의 부흥 목사였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이성봉목사에게서 그 부흥운동의 골격 과 메시지가 한국교회 전통을 이룬 김익두목사의 부흥운동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성봉목사에게 영향을 미친 다른 한 분은 이명직(李明稙)목사님이다. 성서학원 에 입하고 나서는 줄곳 그의 강의와 설교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 집의 가난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실로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는데 한국 인구 거반이 반영구적인 기아상태에서 헤매던 날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의 인구 구도는 농민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다만 21%만이 자작농이었다. 하지만 가난은 그 자신의 것이었다.


나는 자살하려는 결심까지 가지고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진 목숨이라 죽지 못하고 다시 살아나 할 수 없이 산곡에 틀어 박혀 일을 하며, 나무를 해서 30리 되는 평양에 가져다가 팔기도 하고 실과를 달구지에 싣고 밤새워 평양에 들어가 팔기도 하였습니다. 점심을 굶고 저녁 굶기는 일쑤였습니다. 실과 판 동 으로 좁쌀을 사 가지고 와서 죽을 쑤어 먹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였 던 것입니다.


그의 아픔이 폐부에 배여 움솟는 그의 메시지에 동감과 공명으로 가슴을 연 겨 레가 얼마나 많았으랴 하는 생각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의 청년 시절은 스스로도 회고하고 싶지 아니하는 일들로 얼룩지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죄인의 괴수", "알 부랑자", "말할 수 없이 타락한 인간", "마귀 의 꾐에 빠진 난봉생활"이라 고백하고 있었다. "젊은 놈이 어떻게 자유 없는 종교 생활의 구속에서 살 것이냐" 하면서 신앙은 40새 이후에 해도 된다는 말로 그 어머 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우리는 이성봉목사의 자서전에서 그의 젊은 날의 방황을 어거스틴에게서 보는 듯하다. 19세 때의 결혼이 그를 돌이키지를 못하였다. "결혼생활이 즐겁지가 아니하 였다." 아내도 처음에는 참다가 "과격한 성격이 생겨"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나는 평생 달콤한 부부의 애정을 모르고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라는 그의 회고에 그의 장차의 전국 순회의 한 가닥 분명한 단서가 잡힌다.


나도 또한 가정에 쾌락이 있었다면 지금같이 이렇게 널리 돌아다니면서 주의 일을 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후에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에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된다. 1920년 6월 24일의 일이 다. 주일날인데도 평양에 가서 장사한다고 실과를 따 가지고 간 때의 일이다. 그 날 밤 갑자기 오른쪽 넓적 다리가 쑤시기 시작하고 그것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3 년간을 고생하게 된다. 없는 살림에 논밭 다 팔게 되고 죽음의 공포가 무섭게 그에 게 닥쳐 들었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이 몸을 주께 마치고 이 사실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또한 나의 뒤로 오는 후 배 청년들에게, 이것을 증거하겠나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섭리를 전하겠 나이다. 예수를 증거하겠나이다.


그는 이제 성경이 그렇게 꿀보다 단 것을 알기 시작한다. 한데 그 병이 3년을 끌 었다. 그는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그는 가냘프지만 독립운동 단체 에 가담하여 조국을 위해 싸울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발각되어서 여 럿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한데 이 긴 와병(臥病)으로 그는 이 옥고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2. 회개의 신학


그는 이러한 긴 세월을 신앙과 삶의 구조적 긴장 관계 안에서 살다가 이제 회개 의 격변을 거쳐 몸 바쳐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결단으로 새로운 생의 길목에 들어 선다.

회개, 그것이 그의 신학이 핵심으로 등장한다. 신앙의 길을 여섯 살의 나이에 들 어서 눈에 띄일 만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알 부랑자로 지나던 날의 회한이 사무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신학교에 다니면서 섬기던 청량리교회의 어린이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애통하며 회개 자복하는 것을 목도하고서는 회개에는 반드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한다든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는 1928년 신학을 졸업하면서 "점점 사명감에 불타 어서 속히 나아가 전도할 마음이 간절"하게 된다. 그것은 예레미야 1 장을 읽으면서 받은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성서학원을 다닐 때는 1925년대였다. 그 연대는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좌절의 위기였다. 3.1운동의 현실적인 좌절도 겹친 데다가, 공산 사화주의의 의 만연과 기 독교적이 아닌 서양 세속문명의 확산으로 기독교의 한국 근대사에서의 위상이 전과 같지 않고 비판과 경시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었던 때였다. 황망한 허무주의적 기 상이 감돌던 때였다.

이런 위기는 1920년대 중반에 한국의 유명지(有名紙)들이 주로 사회주의계 기자 (記者)들의 교회 반격과 반제(反帝) 운동의 일환으로 미국 선교사들을 중상 모략하 는 일대 조직적인 기사가 연일 일간 신문지들을 뒤덮으면서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 화할 만큼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위기가 성결교회의 성서 신학원에도 닥쳐오고 있었다. 1926년 1월의 성서 학원 자퇴사건이 그것이다. 이성봉목사는 당시 학생으로 2 학년이었다. 눈으로 다 목격한 것이다. 이성봉목사는 그 학생들 전체의 자퇴 소동을 일으킨 학생들의 주장 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곧,


1. 선교사들이 금전의 권세를 가지고 민족적 차별을 한다는 것

2. 학생들을 잘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

3. 교수진이 약하다는 것


그는 이 사태가 불평 불만에서 온 것으로, 그것은 사탄의 씨요 불행의 초보라고 간파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꿰뚫어 보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문제 가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는 금식 기도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도생활에 의 사명을 확신하고 그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였다.

그의 회개의 신학은 수원교회에 부임하여 놀라운 신유의 역사로 부흥하던 교회 에 1929년 여전도사의 갑작스러운 운명으로 시련을 겪을 때에 다시 정련(精鍊)된다. 그는 이로 인하여 인신(人身)의 윤리성까지 의심받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때 그 는 어느 날 4시간에 걸친 사투의 시간을 거쳐 회개의 참된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그의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그의 신앙생활 철저를 기하 던 시간에도 계속 노출되었던 사실을 본 일이 있다. 회개의 신학은 바로 이 문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된다. 그는 획기적인 신앙의 격변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자연인 그 인간성의 실체를 외면하거나 멀리 두고 초연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뉘우치고 회 개한다. 하지만 다시 인간적 시험이 닥친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지긋한 힘으로 공 세를 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악마의 속삭임을 듣는다. 악마는 차라리 그의 회개의 불철저를 냉소하는 형태로 임한다. 그는 이 사탄이 그를 괴롭히고 그의 신앙을 위 협하는 존재로 보는데, 계속 주님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하고 사탄과의 외로운 싸움 이 계속된 경험을 쓰라리게 회고한다.

여기 사탄은 유혹의 존재로서보다는 확신과 신앙을 동요시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회개의 불가능성의 확인자로 역할 한다. 악마는 이성봉목사에게 있어서 저기 서 있 는 실체가 아니다. 살아서 안과 밖, 부드러움과 단단함, 밝기와 어둠을 함께 가진 탄력과 융통과 여유의 사신(邪神)인 것이다.

그는 회개의 어려움을 이렇게 희곡화(戱曲化)한 것이다. 마침내 그는 땀을 흠벅 이 흘리면서 긴 시간의 사투 끝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철십자가를 보게 된다. 승리 의 시간이었다 회개가 이루어진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천국의 환희. 열복(悅服)을 누리게 된다.


나 위하여 흘리신 십자가밖에 붙들 것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부 활하신 예수여, 살아 계신 주님의 위로를 주시옵소서 하며 애 쓸 때, 그는 나를 어루만져 주시며 천국으로 가자고 올라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한없이 한없 이 갔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 수정 같이 맑은 요단강 물이 흐르고 저편에서 화 려하고 찬란한 천성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씻겨진 모습, 그는 그것이 회개의 참된 열매로 본 것이다. 회개, 그것이 죄된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의 구원의 길, 바로 그 길이라는 것을 그는 이 렇게 실존적으로 겪고 그리고 그 사실을 전파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것이었다.

이러한 회개의 신학은 필경 인간의 중생(重生)을 통한 거대한 변화의 사건으로, 인간이 달고도 유위(有爲)한 하나님의 종으로, 사회적 인재로, 사역을 다하는 훌륭 한 인간으로 서게 되는, 인간 개조의 강력한 계기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의 남다른 메시지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성결의 복음이다.

그는 인간의 성화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완전 히 한 순간에 완벽하게 도달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보지 아니하였다. 단번에 된다 는 것은 사탄의 꾀임이라는 것을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조금씩" 잘 믿어 나가 는 일, 그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서 그의 시간(時間)의 신학(神學)을 들 수 있다. 그는 시간이 카이 로스(kairos)라는 점을 강조한다. 회개는 어떤 기회가 있는 것이다. 기회는 한번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총체 개념과는 판이(判異)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오랜 시간 계속되는 동안에 쌓아 올린 어떤 총계가 우리의 신 앙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현재, 그 순간이 문제인 것이다.

그는 아주 유머로스하게 이 시간의 신학을 전개한다. 곧 마귀들이 인간을 타락하 게 하고 멸망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던 중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인 간으로 하여금 "내일" "요다음" "차차"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의 풍조 중에 시간의 장구성이나 여 유를 빙자하여 언젠가는 잘 믿을 때가 있을 것이라는, 유보적(留保的) 자세를 비판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역시 회개의 열매에서도 당장에 완결하려는 의도가 신앙적 이 아니라고 해서 한 말이었다. 그것은 신앙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다른 하나의 그 의 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지옥이라는 것이 기회를 잃은 자들이 가는 곳이 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시간의 신학, 순간의 신학, 신앙이 언제나 "도적 같이 오시는 주님"을 맞을, 그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긴박성과 현재성, 그것을 그는 주기철(朱基徹)과 함께 체계화 한 한국교회의 신앙인이었다.

이 "도적"의 개념은 갑작스러운 주님의 오심이라는 것 말고도 따른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을 가진다. 도적은 좋은 물건을 가지려 온다는, 그런 주님의 신앙 확인의 기회로도 포착한다. 미천하고 값없는 물건 같은 것을 얻으려고 도적이 몰래 혹은 밤에 숨어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 비유는 우리의 준비된, 하나님 보시기에 가져가고 싶은, 그런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어야 한다는 신앙으로 인도된다.

이처럼 이성봉목사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의 메시지의 중심이오 그 핵심이었다. 무죄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죄를 한번도 범한 일이 없다고 자랑하는 자의 깨끗함이 아니라, 차라리 자기가 죄를 누구보다도 많이 지은 죄인의 괴수로 알아서, 예수 십자가 앞에 가 서 자기 죄를 통회(痛悔)하는 순간에서 얻는 깨끗함,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논리이다. 한국 기독교회에서 부흥운동이 남긴 가장 커다란 공헌 가 운데 하나가 바로 이 이성봉목사의 이 엄청난 논리이다. 지옥 가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가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강단 메시지의 드라마틱한 구조의 역동성을 보여 주는 소중한 공헌이다. 회개의 강조가 이런 구도로 전달되었을 때의 말의 영 향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4. 그의 부흥운동


4.1. 그의 부흥운동의 사역의식


그의 교회 부흥의 발길은 실로 험난하였지만, 거기 온 생애를 바친 그런 것이었 다. 그는 모친상에도 임종(臨終)하지 못하였을 정도였으며, 그 후에 하로 그것도 겨우 몇 시간을 겨우 내서 들려 보았을 뿐, 다시 만주교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 여서 떠난다. 그리고 평양에 가서는 남의 집에서 살고 있는 두 어린 딸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들의 정경에 기가 막혔다. 그런데도 또 곧 떠난다.


마침 어린 두 딸은 저희들끼리 배급 쌀로 죽을 끓여 놓고 찬바람이 휭휭 도는 냉방에 앉아서 서 떠먹고 있었습니다. … 아버지는 만주교회에 집회 약속을 했으 니 불가불 가야 되겠다 하고, 차마 일어서지 못할 사정을 이기고 벌떡 일어섰습 니다. 차시간에 데려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다가 뒤돌아보니 아이들이 아비를 전 송한다고 추운 겨울날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뒤축이 다 떨어진 운동화를 끌고 양말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붉은 살이 나 오고, 털 자 하나 쓰지 못하고 떨어진 수건으로 귀를 싸매고 따라온 보습을 볼 때에 마음이 동요되었으나 다시 결심하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가 떠날 때까 지 가라고 하여도 돌아가지 않고 떠나는 아비를 전송하려고 떨고 서 있는 어린 딸들을 보니 자연히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이성봉목사는 계속 울고 있었다고 한다.


주의 정병(精兵)은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아니합니다.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사역에의 절대적인 순종 의 자세는 6.25를 겪으면서 수많은 이들이 순교와 납치 그리고 숙청(肅淸)으로 얼룩 진 곤경을 헤치도 나오면서 스스로도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시련에서 아직 은 할 일이 있어서 살아남았다는 확신을 굳히면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자세는 그의 병약한 몸으로 계속 당면하여야할 일로 여러 차 례 겪는다. 황해도 송화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갑자기 온 몸에 고열이 나면서 운신 을 못해 강단 위에 쓸어져 앉고 한 시간 반을 설교한 일이 있는데, 그 때 그는 그 의 유명한 말 곧 "입으로 설교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남해교회에서 설교하다가 맹장염으로 고통을 당해 설교를 "결사적"으로 계 속한 일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그에게는 비일비재하여서 들것에 실려 누워서 이 교회에서 저 지방으로 가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고, 걷지 못해 사람들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걸어가 주의 말씀을 외친 일이 허다하였다.


이러다가 나 죽으면 하나님 손해 나지 나 손해 나겠습니까.


그의 이 유머 섞인 장담에 그의 하나님 주신 사명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이 깊 이 뿌리 박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일본, 만주, 한국의 전역, 농촌, 도시, 산촌, 섬, 여러 곳을 다닐 수 있었고, 그의 "전도를 받아 목사 된 사람이 부지기수요, 장로, 집사 전도사가 된 사람이 이로 헤아릴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모모한 교단 교회들을 다 망라하여 찾아 다녔고, 대중집회 때에는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 리기도 하여 하로 5, 6 차의 집회를 인도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주로 작은 교회들 미약한 교회들을 향해서 더 많이 발걸음을 옮겨 그 부흥과 발전에 힘 썼다.

더구나 그는 1954년부터는 자신의 부흥운동을 크게 몇 시기로 나누어 집중적으 로 순회 부흥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대단히 체계적인 활동이요, 스스로 그런 신앙의 구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첫 시기가 1954년 5월부터 1955년 4월말까지의 임마누엘 특공대 시기이다. 그 때 그는 대대적인 공세적 부흥운동을 진행하였는데, 그는 그 일정과 사건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난 은사들을 일일이 기록하였다가 이를 공간한 일이 있다.

다음은 성결교회의 희년(禧年) 준비 성회기(1955, 4. 27 - 1956. 3. 18), 그 다음 이 희년 전도대(1957. 5.15 - 1957. 12. 29), 그 다음이 제주다 하기 전도기, 그리고 미국 전도 순회기이다.

특히 희년 전도대 당시에는 수천 명이 회개하였고 수십만 군중에게 70여 회에 걸쳐 복음의 씨앗을 파종하고 있었다. 본래 계획은 년간 50회였던 것이 70회로 늘 어났던 것이다.

그의 부흥회는 새벽기도, 유년주일학교, 장년주일학교, 대예배, 오후 성별회, 밤 집회, 이렇게 꽉 짜여져 있었다.

이렇게 보낸 그의 장구한 부흥운동의 역정(歷程)을 돌아보면서 그는 이런 글을 남긴다.


나의 갈 길은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일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말을 내 가 알지 못하고 내먹을 것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오직 주님께 바친 몸, 그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신앙생활 40년간에 부흥 사명 임한 지 23년 동안 … 지난 자취를 회고해 보면 신기하고 오묘하신 주님의 섭리 와 경륜을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이나 계획으로 된 것이 아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적 소 명에 따랐을 뿐이라는 단언이었다.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사역이었다는 것인데, 이것 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커다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민족구원의 꿈을 그의 부흥운동과 연결해서 말한다. 한국 기 독교회의 역사적 사명은 교회의 부흥에 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순회전도 여행을 끝마치고는 민족을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사역과 그 위상을 골똘히 생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민족이 복을 받으려면 우리 민족의 양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성봉목사의 부흥운동이 마침내 민족구원의 대역으로 한국교회의 눈길을 돌리 게 하고 간 것이다.


4.2. 해방이후의 한국교회의 재건 부흥운동


우리는 여기에서 특히 이성봉목사의 해방이후의 한국교회 부흥과 재건에 끼친 커다란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는 한국교회가 오랜 일제의 압제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방을 얻은 데에도 불구하고 우리 찬송가 안에 당시의 감격을 찬양하는 찬송가 하나 없다는 사 실에 놀란다. 한데 이성봉목사는 당시 만주 무순(撫順)에서 해방을 맞고는 해방의 찬송가를 하나 불렀다.


1. 할렐루야 우리 동포들아 하나님 찬양해

오묘하신 섭리로 우라 나라 해방돼

대한 독립되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만민들아 함께 모여 와서 주의 영광 보이라


2. 할렐루야 세계 만민들아 여호와 찬양해

신실하신 그대로 공의의 칼을 가지고

권세 위엄 베푸사 교만한 자 물리고

이방신을 때려 부쉈으니 할렐루야 즐겁다.


3. 할렐루야 우리 성도들아 우리 주 찬양해

말씀하신 그대로 무한 자비 베푸사

크신 능력 가지고 원수 마귀 박멸코

자유 평화 내려 주셨으니 할렐루야 즐겁다


4. 할렐루야 백의 동포들아 네 사명 중하다

주신 은혜 감사해 분골 쇄신되도록

몸과 맘을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같이 사람 사랑함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는 이 찬송이 만민과 함께 온 세계의 역사 구도 안에서의 한국 해방이라는 사건으로 이해한 그의 사안(史眼)에 우선 끌린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 사명 받 아 세계로의 사역을 확인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당시 1945년 8월의 신앙이었 다.

그런 역사적 소명을 위하여서는 한국교회의 재건이 우선 필수 과제였다. 그는 1945년 9월 15일에 귀국하여 북한에 머물렀다. 한데 그의 눈에는 교회 목사들의 정 치 운동이 눈에 거슬렸다.

이제 이성봉목사는 교회 재건만이 한국의 미래를 약속한다고 확신하고 교역자들 과 함께 이 재건운동을 힘써 펴나갔다. 곳곳에 성령의 불길이 치솟았다. 하지만 주 의의 발호(跋扈)를 보고는 마침내 1946년 3월에 월남(越南)하게 된다.

그는 성결교 신학교의 이사장 일을 1년으로 마감하고, 악전고투로 일제 때 매도 (賣渡)해 버렸던 교회들을 다시 찾아 복구하면서 신학생 임동선과 이성민 두 사람 과 함께 재건 집회를 도처 열었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실로 1년에 최고 82 군데 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었고, 그리고 때로 5일간을 밤낮 없이 강행한 일이 부지기수였다.


4.3. 임마누엘 특공대 전도


그는 1954년 5월에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부흥운동을 통하여서 특히 교회가 부진 하기로 이름 난 강원도(江原道) 지방을 집중 공략한다는 결심으로 단신 임하였다. 그리고 대교회 집회는 일체 사절하기로 한다. 그는 스스로 이제 그의 사역의 마지 막이 가까운 것으로 알고, 그의 심중에 가장 보람있는 사역의 전선에 헌신하기로 한 것이었다.


농촌과 산촌, 도시 등지에서 부흥사를 못 청하는 곳에 이끌리어 갑니다.


그는 스스로가 베드로의 노년기 곧 "윈치 않는 곳으로 잡아가리라"한 일이 자신 의 길이 된 것을 알게 된다. 세태의 동향과 교회의 형편을 보고, 이제는 환영보다 배척의 길, 평안한 길보다 괴로운 길, 원치 않는 곳으로 잡혀간다고 확신하였다. 그 리고 그런 길에 들어 선 것을 감사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게 도니 이유를 이렇게 천명한다.


1. 주님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친구 되시기 때문이다.

2. 시대가 너무 자유주의로 흘러 교회조차 법적 질서가 없고 혼란 무질서하여 이단과 속화를 방지하기 어려워, 이제는 내부 결속이 시급히 요청되기 때문 이다.

3.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키기 위함이다.

4. 타인을 대교회에 가기 바라고, 자기를 위하여는 소(小)를 구하는 뜻에서 그 렇다.

5. 약소 교회를 동정하져 은혜를 고루고루 나누기 위하여서이다.

6. 새 시대 남북 통일을 위한 전도 훈련과 작전 계획 때문이다.

7. 환영하는 헬라로 가지를 아니하고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신 주님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밟아 보려는 심정에서이다.


그의 부흥운동의 진실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약한 교회를 우선 돕자는 것, 내부 결속이 긴급한데 그런 것이 가장 필요한데도 가서 도울 사람 없는 곳에 간다는 것, 나 자신의 참된 신앙의 삶을 위하여서, 십자가 지신 주님의 길을 좇기 위하여서, 그 리고 남북 통일의 준비를 위해 전도 전략의 계획을 위해서, 이런 곳을 택하여 간다 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참된 부흥운동의 실체요 그 목적이 아니던가. 그는 이것을 가르치고 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 특공대 전도에서 유난히 전투적인 표현을 많이 쓴다. 출전, 토벌, 접전, 백병전, 빨치산 토벌, 무혈 점령, 산악전, 산발전, 돌격, 탈환, 시가전, 혈전, 전 격전, 야습, 협동대전, 대봉전, 접수, 결전, 야전, 수륙작전, 맹훈련, 상륙전, 열전, 병 고전, 결사전, 소탕전,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특공대 1년 전과(戰果)로 포로 석방 8천 여명, 헌금 1천 만환 이상. 이제 특공 대는 만기 제대되어 민병으로 돌아가 …


이런 전투적 자세는 그만한 필사의 각오가 있었다는 말일 터인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나 그 전파 그리고 부흥운동이라는 것이 모름지기 이런 자세를 기본적으로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4.4. 그의 부흥운동의 현실적 役事


그의 부흥회는 194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형적인 형태 구형(構形) 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역사(役事)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교회 건축의 물리적 활성화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의 부흥회가 교회당 건축이나 증축의 현저한 성과를 올린 기사를 경탄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실을 예의 주시하고 기록에 남긴다. 가령 인천 중앙교회는 천막집회 1년만에 벽 돌 2층 백여평의 성전이 건축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그의 부흥사경회 일정 기 록에 대거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교회 안의 어지럽고 불화하였던 일들이 깨끗하게 해결되었다는 결실이다. 그는 이런 일의 성사를 자신이 이끈 부흥회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그 결실로 자랑하 기를 마지아니한다.

그 다음은 그의 부흥회의 결과로 신앙의 현상적인 고양(高揚)과 감격의 폭발이 다. 은혜가 넘치고 감사의 찬송이 실제 그 이전의 교회와 엄청난 대조를 이루는 것 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헌금(獻金)의 증가이다. 때로는 금지환이 밭쳐진다. 감격과 감사 때문이었다.

다음은 실제로 신유의 은총이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가령 잉태 못하던 여인이 잉태한 사실은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신유(神癒)의 기적도 많았다. 하지만 회 개하고 새 사람이 된 기적이 더 큰 이적이 아니겠는가. 아편(阿片)하던 사람의 회개 와 목사된 일, 한센병 환자들이 오히려 감사하게 된 일, 이런 목전의 열매들이 그 의 부흥운동의 경이와 영향력이 된 것이다.

그래 결신자(決信者)의 현저한 증가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의 결신자의 숫자(數 字)를 정확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부흥운동의 가시적 성과 기대 는 그의 특공대 이미지만큼 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4.5. 그의 부흥회 言語 문제


이성봉목사는 그의 부흥회를 시종 열기와 경청(傾聽)으로 일관되게 끌고 갔다. 오랜 기도에서 용솟음 치는 생명의 활천(活泉), 은혜에 넘치는 메시지, 적시적의(適 時適宜)의 주제, 그의 확실한 메시지의 주제 전달, 그리고 온 몸으로 하는 열정의 메시지 전파, 가끔 터지는 그의 감격 찬 자작 찬송가의 영창, 이런 것들이 그 견인 력(牽引力)이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조고 싶은 것이 그의 언어 구사력(驅使力)이다. 그는 중학교와 신학교 교육 이외에는 많은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는 가끔 당돌하고 적시의 한문(漢文)을 구사하여 한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상황 설명이나 비유를 적절히 조화하는 묘한 전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단식 일 표음(一簞食 一瓢飮)근근호구(僅僅糊口), 위지사경(危地死境), 이천(易遷), 우울니(憂 鬱尼), 오불관언(吾不關焉), 영고성쇠(榮枯盛衰), 장중보옥(掌中寶玉), 일승우일진(日 勝又日進), 우몽(愚蒙), 해타(懈惰), 자시(自恃), 유방백세(流芳百世), 유취만년(遺臭萬 年), 무가내(無可奈), 숭로반(崇露盤), 애곡절치(哀哭切齒), 이런 것들이었다. 당시로 서는 한문을 쓰는 풍조가 지금보다 더했다는 사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이 러한 유식한 한문의 사용은 그의 설교의 맛을 더해 주고, 메시지 전달의 힘을 돋구 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다른 하나는 적절한 유머의 구사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든다. 한번은 수원에 있을 때 아주 더운 날 어떤 집에 심방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때 마침 여름이라 시어머니, 며느리, 딸 모두가 웃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벗고 홀바지 바람으로 마루에서 발을 치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가 여보세요 하면서 들어가니) 모두 일어나서면서 "애 내 치마, 내 적삼" 하며 떠드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먼저 치마를 입고, 치마끈을 매면서 "들어오세 요" 한다. 나는 다 입은 줄 알고 따라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아직 적삼을 못 입고 헤매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에구머니" 하더니 뒷문으로 벌거숭이로 뛰어나간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앉아서 기도하는데, 며느리는 저의 딸 이름을 부르면서 "영 자야, 영자야, 내 적삼 내 적삼"하니 영자는 아무리 보아도 적삼이 없다.


더구나 그의 언어는 때로 토속적이고 또 백성들이 늘 쓰는 구수한 말들을 자연 스럽게 쓴다. "놈", "볼 사납게 군다", "팬티까지 발가벗겨", "도둑질해 먹는 물이 더 달다", "60배 자리만도 본전까지 네 알이 썩어 가지고도 56개가 남는다", "새빨간 거짓말 하얀 거짓말", "교회는 천국의 지상 지점(支店)", 이런 것들이었다.

이러한 그의 소박한 언어의 구사는 청중과의 언어 소통의 채널을 확실하게 설정 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복음이 먼 나라의 일이거나 접근이 난감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일상의 소박한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엉켜 있다는 사실을 시위하는 대단한 성 육신적(成肉身的) 사크라멘트 신학의 모뉴멘트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사에서 이런 언어문제를 길선주나 김익두 그리고 정남 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어떤 유기적 연관이나 계보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 독자의 입장에서의 메시지 전파 방법에 자생적 형태로 보는 것이 좋 고, 따라서 기독교의 일상화 특히 그 언어에서의 가장 정확한 통로가운데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차지하는 무게가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4.6. 그의 부흥운동의 自己省察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성봉목사가 "신학생, 전도자, 교역자를 위한 부흥 지침서"로서 [부흥의 비결]이라는 저서를 낸 사실이다. 여기에는 부흥의 의미와 필 요성 그리고 전도자의 자질이나 사명과 같은 것을 마무린 말하자면 부흥신학이 있 고, 그리고는 부흥회 때 하는 여러 형태의 부흥 설교 여러 가지를 대지(大旨), 소지 (小旨)등의 형태로 성서의 말씀 그대로 따라서 체계화 한 것들이 있다.

그 설교들은 대개가 다 아주 명확한 체계적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성서의 말씀 으로 연결해 가면서 한 단위의 어떤 완전한 구도를 가지게 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 를 그가 분석적으로 읽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더구나 그는 이런 구도에서 항상 현실 교회의 문제를 차출해서 거기 해당한 교회의 부족과 흠을 책망하는 형태로 구 성하고 있다.


후배 사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신구약의 모든 선지 사도들을 통하여 또는 교회 유사(有史)이래 각국 부흥사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부흥 설교의 말씀과, 나에게 직접 계시하시고 체험시켜 주신 모든 말씀이 유익한 참고 자료가 될까하여 여지껏 전하던 순복음의 골자와 진수를 엮어 내놓게 되었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외치던 이성봉목사의 발자국이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에 남겨지는 다른 하나의 경우이다. 부흥목사들의 설교가 힘에 넘치지만 대개 현장에서의 자발성과 그 영감이 압도하는 것이기 때문 에 그것이 반성되고 글로 씌워졌을 때의 감도(感度)는 사뭇 다르다. 한데 이성봉목 사는 이 위험을 무릅쓰고 훌륭한 부흥신학의 글을 남긴 것이다. 부흥복사 자신이 이런 글을 쓴 것은 과문(寡聞)의 탓일지 모르나 그가 처음인 것이다.

더구나 그의 설교집 간행자는 이 [부흥의 비결]의 간행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곧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말씀을 전하겠다는 결사적인 각오로 나아가다가, 그것 으로도 감당 못해서 책으로 내어 외친다.


이제 죽은 후에도 그의 말씀 선포를 계속한다는 그런 뜻일 것이다. 그의 사후에 도 계속 그의 음성을 들리게 한다는 의도라는 것이었다.


4.7. 그의 부흥운동과 再臨 사상


그는 재림이 임박하였다는 생각에 늘 잡혀 있었다. 우리가 도적의 갑작스러운 침 입을 말하는 곳에서 이미 그의 재림사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림의 날짜를 계산해 내는 따위의 재림사상에는 그것이 "마귀의 소리"라고 해서 이를 철저히 이단시한다. 그 날짜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이 아 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재림의 확실성을 말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약성서에만도 재림 에 관한 말씀이 3백 번 이상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성서의 말씀이니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의 도덕적 애매성, 불공정하게 묻혀진 수많은 과거의 한(恨)들이 세상 끝 날에 엄밀한 조사와 공정한 판단을 받아야할 때가 있다 는 것이 공의의 하나님을 말하는 기독교의 마지막 복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재림의 사상은 우리들 신자들에게는 한 윤리적 삶의 중추가 되기도 한다. 심 판의 도래라는 확실한 사실 앞에서라면 절제와 근신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불가피해 진다.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말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요구된다.


인생을 든든히 붙드는 유일한 힘은 천국에 대한 희망 (곧 재림의 희망)인 것이 다.


이성봉목사는 이처럼 신앙과 윤리의 차원 연결을 이 심판의 교리로 깨끗하게 맺 아 주고 있었다.

한데 심판은 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합리성과 부조리 그리고 모순을 말하는 직접적인 명제가 된다. 이 세상의 역사는 그 자체의 심판력과 교정력(矯正力)이 없 다. 그러기에 주님이 오신 것이고 복음으로 심판을 하시되 마지막에 가서 최후의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본래적 진리가 없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 세 상과는 역리(逆理)의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다 살 아져 간다. 따라서 그 때 그 때의 이(利) 만이 장단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선악 이 엉켜 그 판별이 불가능하다.

그는 특히 교회 안의 비리와 냉정과 갈등의 심각함을 걱정하였다. 그의 비판적 교회론은 이 재림론의 다른 하나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나그네의 심정으로 잠시 있다가 떠날 곳으로 이 세상을 보 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귀향의식이 강하다. 그 하늘 나라의 도래가 바로 재 림인 것이다.

이런 재림론이라 해서 그가 세상을 비관하고 포기한 자세로 산 것은 물론 아니 다. 아름다운 세상을 그는 노래하였다. 우리 신체의 오묘함을 감탄하였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그런 세상이 아니던가. 여기에서 우리는 준비하고 가꾸고 연단 하여서 재림의 주를 맞을 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훈련하는 장소, 회개하는 곳으 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5. 결론


이성봉목사는 한국교회 수난과 혼란의 일제말기와 해방이후의 남북 분단 그리고 6.25전란의 한 복판을 살다 간 한국교회 유수의 부흥목사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 대적 사역은 그가 바로 그런 시대에 보내어졌다는 사명감으로 불타게 하였다.

그는 말로 다 못하면 죽음으로 한다는 결의로 국내외를 편력하였으며, 몸을 가누 지 못할 정도의 병약에도 들것에 실려 다니고, 걷지 못해 달구지나 지게 위에 몸을 맡겨 이동하면서 쉬지 않고 말씀을 선포하노라 가진 기력을 다 썼다.

그는 회개의 신학으로 요약되는 신앙으로 그의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다녔다. 그 의 신앙은 그가 실제 몸으로 겪고 그 체험이 살아서 그의 체질이 되는 그런 신앙과 삶의 실존 속에서 살아간 모습 그대로의 실존이다. 설교할 때의 예화들도 대개는 다 그 스스로 겪거나 목격한 산 증언들이요 육성이었다.

회개의 메시지가 가지는 호소력은 역시 그가 인간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계 속 시험과 유혹에 노출되는 인간성의 어쩔 수 없는 바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무 치는 회한의 심정으로 그런 메시지를 전파할 수 밖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설교에 다들 끌리고 그의 호소력에 모두가 공감해서 다투어 회개와 회심(回心)에 이르게 된 까닭이 여기 있었다. 그는 고고한 성자의 풍채를 지닌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의 설교에는 우리가 일상 겪는 기본적인 사건들이 그렇게 소박하게 엉켜, 복음의 메시지가 그런 데에서 그런 강렬한 말발을 세우는 것인가 하는 감동을 일으 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타락이후설(Infra-lapsarianism)의 한국적 모델이었다.

한국 근대사의 시련기에 그 만이 던질 수 있는 메시지가 있었다. 왼통 불확실하 고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때였다. 그리고 그런 것이 인간의 죄와 회개하지 아니한 인간의 안주(安住) 때문이라는 선포는 가 닿을 귀가 많았다. 그런 시대일수록 현세 적 안주(安住)보다는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는 심정이 오히려 희망과 안위를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성서적 소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탄핵하고 비관하지를 아니하였다. 주님 맞으려 간곡히 준비 하는 여정(旅程)으로 받아 드려 감사하였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그 독생자를 보 내신 그 세상아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허물이나 죄 때문에 구세주가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세상, 여기 은총이나 축복의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감사하였다.

한데 그는 1959년에서 1960년초 까지의 미국 순회 전도를 하고 나서부터는, 한국 의 기독교회라는 의식보다는, 민족구원의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회개 의 기독교적 신앙을 민족의 양심의 각성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피력한 일 이 있다. 그의 서거 4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비젼으로 보았던 민족교회론의 형성은 그가 가고 난 다음의 경륜으로 넘겨졌다.

연구논문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
9.
이성봉의 성서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좌 담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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