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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이성봉 목사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기조강연)

정진경(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영적각성과 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하신 이성봉 목사 (1900-1965)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분의 신앙과 사상 부흥운동을 재 조명함으로써 그의 크신 업적을 기리고 미래의 바람직한 부흥운동의 모델을 개발해보려는 이 신촌포럼에서 나는 이성봉 목사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토대로 이목사님의 살아오신 면모를 회상해보고저 한다.

내가 처음으로 이목사님을 뵙게된 것은 그가 신의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신 때였다. 그 때 저는 소년시절이었다. 그때의 저의 기억으로는 우선 이목사님의 풍채가 뛰어났고 성대가 좋아서 찬송을 부르면 모든 성도가 매혹될 정도였다.

비록 일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도들에게 그분처럼 인기가 높은 목사님은 처음이었다. 이목사님은 성격이 쾌활하고 마음이 넓어 포용력이 크신 분이었다.

이목사님은 개교회 목회 보다는 전국교회를 목회의 대상으로 전도사역을 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물론 가는 교회마다 부흥시키고 큰 역사를 일으켰으나 그의 전도의 꿈은 개교회가 아니라 전국교회였다.

1937년 이목사님은 성결교단 총회에서 전국교회 순회 부흥목사로 임명받은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부흥사로 헌신하신 분이시다. 이목사님은 일년이란 짧은 기간 계시다 떠나셨지만 신의주교회에 남긴 그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지금 회고해 보면 이목사님은 그때 이미 개교회나 교파의 울타리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내 다보는 비젼을 갖고 계셨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후에도 그가 집회하시는곳이면 자주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고 저에 대한 기대도 있어서 한번은 조용히 집회가 끝난후 개인적으로 불려서 장차 부흥사가 되라고 권고 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으셨다.

내가 오랜 세월 그의 주변을 돌면서 받은 첫 번째 인상은 그의 철두철미한 소명의식이었다.

그는 소명감에서 살았고 불타는 소명감에서 일했고 소명을 위해서 죽은분이다. 이목사님은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회고록 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아 어린 마음에 나도 김익두 같은 위대한 부흥사가 됐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를 멀리하고 세상에서 방황하기 시작했 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환경이 그가 바라는 앞길을 막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기는 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전환이기도 했다.

그는 18세로부터 21세까지 자포자기하는 탈선의 길을 걸었다. 그가 21세되던 1920년 6월 24일 주일에 중화읍에 있는 과수원에서 실과를 따서 싣고 평양에 가서 팔아 그 돈으로 그날 밤새 술을 마시고 밤늦게 마차를 타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이름모를 병으로 쓰러졌다. 6개원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다리에 골수염으로 판명되었다.

이 목사님은 6개월 동안이나 웅직이지 못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기간은 그가 죽음과 싸우는 기간이였다. 이 때의 심경을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 했다. "죽음 앞에는 모든 것이 매장을 당한다. 돈도 전답도 고대광실 같은 집도 지식도 권세도 죽음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때부터 이목사님의 가치관은 변하기 시작했다. 염세적인 인생관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은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그는 자기가 지은 죄를 자각 하게 되었고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무서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통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 기간은 약 3년 걸렸다. 죽을병에서 해방된 그는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 었다. 이 때부터 이목사님은 자신의 여생을 하나님께 바쳐 자신과 같이 병든 불쌍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25년 그가 26세 때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딴 세계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병상에서 얻은 중생의 체험 죽음에서 해방된 치유의 은총은 하나님을 위해 인류를 위해 살겠다는 헌신의 동 기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전도 사역에 생을 바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이목사님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기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야 의식을 갖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확신과 능력을 갖고 사명을 완수하신 것처럼 이목사님은 사명의식에 불타기 시작했다.

이목사님이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된 것은 자천에 의함도 아니요 사람에 의함도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 세운 소명의식이 헌신의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의 소명없이 전도자가 될 수 없고 부흥사가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명을 사양할 수도 없고 어떤 방해가 있어도 중단할 수 없다. 이것이 세상 직업과 다른 점이다.

이목사님은 일생을 이 소명의식에 의해 살았고 그 소명의식을 과거 어느때의 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매일 매일 새로운 사건으로,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하면서 사셨다. 마치 바울이 다른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원의 확신을 상 실할까봐 두려워하면서 산 것처럼 이 목사님은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 하곤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목사님은 저에게 가끔 소명감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생각하라고 물으실 때가 있었다.


두 번째로 이성봉 목사님은 철저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 세계의 모든 불행은 죄 문제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인간은 먼저 죄에서 구원받는 일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설교할 때마다 "죄는 문둥병"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원죄와 자범죄에 대한 보수적인 죄관을 천명하셨 다. 그는 모든 인간의 고통은 범죄의 결과라고 하면서 설교때마다 죄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강조한 것은 죄의 속성과 무서운 결과를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중생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고 거듭나는데 필수적인 요건은 회개와 신앙이라고 말했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며 저주와 멸망을 막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입술의 사건이 아니라 반드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가서 회개는 행위적인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소극적으로는 변상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적극적으로는 삶의 변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이목사님이 설교에 강조하신 것은 중생 후에는 반드시 성별된 삶을 살 아야 한다는 성결이다.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삶 즉 모든 불의한 습관에서까지 깨끗하여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목사님이 세 번째 강조한 것은 '신유'의 복음이다. 그가 부흥집회에서 자주 주장한 것은 신유 즉 치유의 복음이다. 이 신유는 이목사님께서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전한 복음이다.

그러나 이목사님은 신유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비주의 로 흐르기 쉽고 이단으로 변질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이런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신앙이 감정과 기분에 좌우되지 말고 말씀에 굳게 서야 될 것이며, 기사와 이적에 지나친 관심을 두지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이단과 사설을 퇴 치해야 한다."

이목사님은 다른 부흥사들에 비해 재림을 자주 강조했다. 재림 사상은 이목사님 의 모든 사고와 삶의 기반이였다. 예수의 재림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 이목사님은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이런 구원의 과정 설정은 전인구원의 방법을 제시한 훌륭한 신학적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이목사님은 이렇게 사중복음을 부흥설교의 핵심으로 전하면서도 이것이 성결교회 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천명한 것은 그의 부흥사역이 교파를 초월한 초교파적이었던 것을 입증한다.

이렇게 그의 복음 선포의 핵심인 사중복음을 강조하면서도 이목사님은 민족사적으 로 절망 빈곤 질병 등으로 좌절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조금만 참으면 새 아침이 올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복음을 주었다.


세번째로 내가 본 이목사님은 흠잡을 수 없는 깨끗한 삶을 사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나 신분에 어긋남이 없는 '깨끗한 삶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먼저 인기 관리에 성공한 분이었다. 내가 알기에는 이목사님 같이 어디를 가나 인기가 높은 목사를 보지 못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의 설교와 찬송을 듣기 위해 원근 각지에서 모여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목사님은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재물 관리에 성공하신분이시다. 그 당시 어떤 부흥사 보다도 부흥회를 인도 한 후에 사례비를 많이 받은분이다. 그러나 그는 물질을 초월했다. 그는 물질 관리에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도에 첫 목회지인 공주 교회에서 시무할 때 이목사님이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다. 집회가 끝나고 얼마 안되는 사례비를 드렸더니 그 봉투에서 돈을 꺼내들고 몇번이나 반복해서 세어본다. 그래서 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중에서 반을 꺼내서 주면서 이것은 정전도사의 몫이야 하시고는 다시 반을 봉투에 집어넣더니 전부를 정전도사에게 주고싶은데 어떤 가난한 전도사를 돕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반만 준다며 미안해 하셨다. 그분은 물질에 청렴하신 분이었다. 많이 벌어서 다 주고 가신 분이다 내가 아는대로는 사모님과 따님들에게는 지극히 인색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목사님이 그렇게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도와 말씀 중심의 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쉬지않고 순간 순간 기도로 모든 일을 처리하셨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어가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셨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나 인간적인 지혜나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생활을 했다.

또한 이목사님은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대화를 하는 중에도 자기 의견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풀어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 중심 의 생활이 그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고 유혹을 이기고 승리로 생애를 마친 비결 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목사님의 부흥운동은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가 사역한 교회마다 수 많은 영혼이 구원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의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 병에서 치유받은 사람들, 절망에서 소망을 얻은 사람들, 특히 그의 말씀과 깨끗한 삶에 감동되어 헌신한 목회자 부흥사 선교사의 수도 교파를 초월해서 수 없이 많다.

이성봉 목사님은 파란만장한 한 세기를 살면서 후회 없이 사명을 완수하신 분이시다.

연구논문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
9.
이성봉의 성서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좌 담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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