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ITEMAPContect Us      
 
부흥 설교
이야기 설교
음성 설교
출판ㆍ자료
一代記 연재
애창곡
성봉기념학술강좌

Home > 목사님자료실 > 출판ㆍ자료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 수원교회 개척 목회를 중심으로 -

송기식 목사 / 수원교회


이성봉 목사의 목회는 수원교회, 목포 북교동교회, 신의주 교회에서 전개되었다. 그후 전국 순회부흥사로 임명받아 잠시 봉천교회, 아현교회, 신촌교회를 목회한 일이 있다 하나, 이때에는 전국교회의 부흥회 인도가 주사역이고 목회는 잠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성봉 목사를 성결교회뿐 아니라 한국교계에 크나큰 영적 각성과 부흥을 선도한 부흥사의 모범으로 인정하는 데는 그 누구도 인색하지 않고, 따라서 부흥사로서의 이성봉, 설교가로서의 이성봉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어느 정도 이루어 가고 있다고 하겠으나, 정작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에 관하여는 별로 연구된 바가 없다. 다만 정인교의 논문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이 목회자로서의 이성봉을 개괄적으로 언급한 것(구령열에 불타는 복음전도 목회, 철저히 영적인 체험이 동반된 목회, 철저히 기도로 풀어 가는 목회, 풍성한 결실을 맺는 목회 등. 정인교,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신덕교회70주년 학술논문집, 149-152)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이 한 교회 담임목회자로서의 이성봉과 그 목회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성봉 목사(당시는 전도사)가 28세의 젊은 전도자로서 수원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던 짧은 시기(1928년 3월∼1931년 3월)는 사실 다음의 몇 가지 제약 아래서 이루어진 목회였음을 전제하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① 아직 목사안수를 받지 못한 젊은 전도사로서 교단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② 기존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거부적 반응을 보이는 수원에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③ 일제가 신사참배의 압력과 가혹한 황민화정책을 실시하던 시기였다.


수원교회 개척

이성봉 전도사는 이혜숙 전도부인과 함께 1928년 3월 28일자로 수원에 파송되었고, 수원으로 이사온 몇몇 성결인과 함께 그해 4월 8일 부활주일에 신풍리의 16평 셋집에서 감격적인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가 교회창립일을 부활주일로 택한 까닭은 이 교회가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는 교회로서, 주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따라, 죽으면 살리라는 의지를 다지는 뜻이리라고 짐작된다.

개척자 일행은 이 전도사의 인솔하에 거의 날마다 수원 역전과 장터를 비롯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나타나서 복음을 전했다. 이 전도사가 코넷이라는 나팔을 신나게 불고 다른 이들은 북을 치면 동네 아이들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젊고 훤출한 미남 전도자의 우렁찬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어서 삽시간에 수원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또 설교 중간 중간에 장쾌한 바리톤 음성으로 복음성가를 부르면 산만하던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모여온 무리들 앞에서 성령이 충만한 청년전도자 이성봉 전도사가 말씀을 전하고 병자에게 안수기도할 때 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가 하면, 전도행렬을 방해하려고 나온 사람들이 어느새 전도행렬의 뒤를 따르는 기적이 연출되고 있었다.


전도 지향적 목회

교회를 개척한 후 이성봉 전도사의 목회는 전술한 대로 당연히 전도 중심의 목회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타는 심정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개인전도와 가정집회, 노방전도를 쉬지 않았다.

그 열매는 매우 빠르게 나타났다. 성결교회 연회 제1회 의사록은 당시 수원교회 교세보고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수원교회는 설립된 지 불과 10개월이지만 주께서 특별히 같이하신 결과 신자의 평균출석이 60명에 달하였으며 제1회로 학습받은 신자가 남녀 11명 남녀 집사가 4명, 월정헌금이 20원에 달하였사오며…”

16평 셋집 예배당은 차고 넘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어린이 전도에 힘쓴 결과 165명으로 보고되었다. 이것은 개척한지 1년이 안되어 장년 60명, 어린이 165명 도합 225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 1931년 제3회 연회의사록의 보고에 따르면 수원교회 장년부 신자는 142명 주일학생 230명이니 도합 372명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대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회개를 강조하는 목회

이성봉 전도사는 사람을 모으는 것만으로 교회가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죄를 회개하고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됨으로 거듭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목회철학일 뿐 아니라 성서학원 시절의 이명직 교수에게서 받은 영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수원교회 설교에서 회개를 수없이 강조했다. 지난날의 죄를 덮어두고서는 새사람이 될 수 없고 죄의 세력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회개와 관련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마치자,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가 지은 7가지 죄목을 써서 내놓고 해결 방안을 물었다. 군청 농회의 김기사였다. 그는 황해도 국무농장 사무원으로 있을 때 공문서 위조를 해서 공금 벼 나락 열 가마를 횡령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그 금액을 교회에 헌금하려고 했으나 이성봉은 교회가 도둑질한 돈을 받는 곳이 아니라고 하며 횡령한 그 기관의 기관장에게 사과 편지를 하도록 했다. 김기사는 고민하다가 벌받을 각오를 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솔직히 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황해도 국무농장 책임자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네 편지를 보고 감사했다. 너는 어떤 종교를 가졌기에 이런 어려운 죄를 회개할 수 있는지 놀랍다. 네 편지를 보니 내 죄도 생각난다. 상관에게 보고했더니 용서하라 했다”는 내용이었다. 김기사는 감사하여 온 교회 앞에서 간증하니 온 성도들이 은혜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목표 지향적 목회

성도의 수효가 늘고 교회가 부흥되자 예배처소가 좁아서 성전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1929년 8월부터 성전건축을 위한 청신기도단을 조직하였다. 사실상 새벽기도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지만 이 전도사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도단을 조직하여 성전건축을 목적으로 기도하도록 지도하였던 것이다.

감리목사 이문현의 연회보고에 의하면 청신기도단을 조직하고 항상 새벽마다 기도하는 아이가 45인이나 된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어린이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어린아이들 45명을 성전건축을 위한 새벽기도에 동원하게 하였는데, 기도만이 아니라 남자는 매일 1전 이상, 부인은 성미(誠米)를 성의껏 떠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도하도록 지도하였다.

또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가난한 신자들에게도 성전건축을 위하여 헌금을 하면서 기도하되 그들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분량을 요구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벳세다 광야의 오병이어 기적에서처럼, 각기 매일 1전 이상, 성미를 한줌 이상 드리면서 주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성전건축이라는 기적이 온다고 하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 1929년 12월 25일 성전헌당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창립한 지 불과 1년 3개월 만의 쾌거였다.


무릎 목회

성전 건축을 위하여 성도들의 기도의 불씨를 모았다고 했거니와 이성봉 전도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친히 기도하여 응답받고 해결받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의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가는 곳마다 큰 능력을 나타내셨다.

노방전도에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가정을 심방하여 병자를 위해 안수하고 기도할 때 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관운장의 그림을 걸어놓고 점을 치는 무당이 병들어 7년간 누워 있었는데 이성봉 전도사가 찾아가서 우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였더니 무당의 병이 나았고, 그는 그시로 모든 제구(祭具)와 우상과 관운장 상을 불살라 버렸다. 다음주일부터 교회에 나와 열심 있는 신자가 되었다.

청년 전도사의 이러한 활약에 마귀가 잠자코 있을 리 만무였다. 이성봉과 함께 파송된 전도부인이 돌연 음독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든 의혹과 비난이 이성봉에게 쏟아졌고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는 억울하였으나 일체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께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다.

인내와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은 모든 진상을 밝혀주셨다. 그녀에게는 우울증과 정신질환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음독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떠나갔던 신자들이 다 돌아오게 되었다. 전보다 더 열심히 믿고 교회는 일익 왕성하니 기도의 승리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전도사는 불철주야 과로함으로 온몸이 쇠약하여 앓게 되었다. 신유를 믿기 때문에 의약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나 그 자신은 의약을 쓰지 않고 견디었다.

주일오후였다. 너무 열이 심하여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공중에서 마귀의 소리가 들린다. 너는 죽을 것이고, 회개하여도 소용없다고 한다. 그는 십자가를 보여달라고 간구했다. 예수 없는 검은 십자가가 나타나기에 “사탄아 물러가라” 외치고 결사적으로 기도하니 주님 달리신 참 십자가를 보았다. 감격하여 그 십자가 붙들고 기도하니 갑자기 정신이 회복되고 정신과 육체가 깨끗하게 나아서, 네 시간을 혼수상태에서 고생한 후에 일어나, 주일저녁 예배에 나아가 간증설교를 했다.

결국 이성봉 전도사의 수원교회 목회는 무릎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은 목회라고 할 것이다. 그는 기도로써 한 가지 한 가지 난제를 풀어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현장을 경험하고, 목회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깨달아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성도들을 돌보았던 것이다.


홍보 감각이 있는 목회

교회가 한참 부흥 중이었던 1929년, 이성봉 전도사는 활천 1월호에 ‘축성탄하신년’(祝聖誕賀新年) 광고란에 수원교회 광고를 실었다. 거기에는 교회 개척 일꾼들의 명단(33명)이 실려 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단 다른 교회 광고에 비해 큰 지면을 차지했고, 시각 효과를 내기 위하여 남자는 한문으로, 여자는 한글로 쓴 것을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다. 이 전도사는 부활주일에 개척예배를 드렸고, 성탄절에 헌당식을 거행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성탄절은 불신자들도 축절인지라 이날에 교회당을 헌당하고 교단본부의 내빈들과 동리 주민들까지 초청하여 큰 잔치가 되게 함으로 전도와 교회홍보의 기회를 삼은 것이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의 부속품을 기부하는 일도 있었으니, 그는 지역사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글을 맺으며

한 가지 더. 수원교회에서 계속 목회하기를 원했으나 목사안수에 실격되고, 약한 목포교회로 파송되었을 때 섭섭한 마음이 있었으나 교단본부의 명(命)에 순종함으로 교단에 속한 목사로서의 정조를 결코 이탈하지 않았던 점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

연구논문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
9.
이성봉의 성서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좌 담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Copyright (c) 성봉선교회. All rights reserved. Directed by Lee Y Sook.
mail : saintja@korea.com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137-3  ☎ 02-332-4700 FAX : 02-332-8700
충주시 상모면 온천리 838-1  ☎ 043-856-8191 FAX : 043-856-8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