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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좌담회


일 시 : 2000년 4월 7일
장 소 : 성결회관 회의실
참석자 : 정운상 목사, 이봉성 목사, 이만신 목사, 송기식 목사,
            이정익 목사
사 회 : 백수복 목사
기 록 : 홍준수 목사



사회 : 바쁘신 가운데서도 귀한 시간 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 함께 나누려고 하는 얘기는 이성봉 목사님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금년 7월 4일이면 이 목사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를 기념하면서, 이성봉 목사님과 관련된 얘기들, 즉 한 성결인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생활을 비롯하여, 모범 목회자로서,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무디 같은 부흥강사로서 모습에 관한 얘기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직접 경험하신 얘기를 중심으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결인의 본이 된 생활

정운상 : 이성봉 목사님이 휴전 직후 제주 집회에 가셨을 때, 주위 사람들이, 목사님이 배를 타고 오시다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가실 때는 좀 편하게 가시라고, 수소문 끝에 군용기를 대절했습니다. 그 때 군관계자들이 이성봉 목사님에게 군복 착용을 요구했습니다. 민간복으로는 군용기를 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죠. 그런데 목사님은 극구 민간복을 고집하셨습니다. 비행기를 못 타는 한이 있어도 목사가 군인처럼 위장하는 편법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군용기 이용은 무산되었고, 목사님은 아무런 불평없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16시간의 배를 타고 돌아오셨다는 얘기가 기억이 납니다. 또 기차를 타실 때, 표가 매진되어 입석밖에 없었는데, 어느 분이 암표를 하나 구해 왔습니다. 목사님은 이를 끝내 사양하시고 입석표로 출발하셨습니다. 목사가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편리를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이정익 : 딸 이의숙 권사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정말 가정에 등한시한다 할 정도로 인색하셨답니다. 옷을 제대로 사 입어 본 기억이 없다 할 정도였는데, 반면 신학생과 어려운 교회를 돕는 일에는 돈을 뭉턱뭉턱 내놓으셨다 합니다. 그래서 이 권사는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가겠다’(?)고 결심을 했다더군요. 그런 아쉬움을 가지고 자란 이 권사이지만, 지금은 그 아버님이 하시던 대로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을 돕는 줄로 압니다.


이만신 : 증동리교회에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당시 치리목사이셨던 이성봉 목사님이 어머니에게 “예수 믿으려면 그런 고난을 참아야 한다”며 격려하시고, 또 많은 신자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조동례(어머니) 성도처럼 믿어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또 제가 목포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성봉 목사님과 가까이 살았는데, 가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사님은 저를 부르시고는, “어이, 이군 내가 반주할 테니 찬송 불러. 쓰면 호랑이고 안 쓰면 쥐새끼가 되는 법이야” 하셨습니다.


이봉성 : 이 목사님은 난치의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믿음으로 치유받고 회심을 경험한 후에, 철저한 체험을 토대로 한 진실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한마디로 정열적인 사고, 깊은 헌신, 남을 포용하는 관용이 남다르셨던 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정운상 : 옳습니다. 남에게는 관용을 베푸셨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목사가 다방에 가면 “목회하다 보면 사람 만나야 되니, 그럴 수도 있지” 하시면서도, 정작 당신은 출입을 안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뿐 아니라, 목사님은 평생을 주먹을 쥐고 다니셨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들고 말입니다. 그리고 강단에서 인사하실 때 세 손가락을 내 세우시면서 인사하십니다. ‘하나님 제일, 예수 중심, 성령충만’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송기식 : 이봉성 목사님은 28세 때 수원교회를 개척하셨는데, 1년이 조금 지나자 400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같이 사역하던 이혜숙 전도사가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교단이 오해를 하고, 신자들도 많이 떨어졌는데, 목사님은 이에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 목사님은 그 때 참기 어려운 것을 기도하면서 견디셨다더군요. 이후 결국 오해가 풀렸고, 신자들도 다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당시로서는 큰 교회가 된 수원교회를 전도사가 주임할 수 있느냐, 목사가 파송돼야 한다는 교단의 입장이 정해지고, 이 목사님은 목포 북교동으로 가야만 했을 때도 목사님은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정운상 : 목사님이 소천되실 때의 얘깁니다. “목사님!” “정 목사가 왔습니다.”그래도 목사님은 아무 반응이 없으시다가, 제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목사님 운상이가 왔습니다” 그랬더니 “어! 운상이가 왔어” 하시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몇 말씀하시다, “말로써 못하면 죽음으로!”라고 외치시면서 자리에서 쓰러지시기에 부축해 드리니 그 시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사모님께서 “목사님 임종이신가 보다. 정 목사가 기도하라” 하시어 저는 임종기도를 드렸습니다. 1965년 8월 2일 오전 11시였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유가족들(사모님, 세 따님과 사위)은, 목사님이 혼수상태에서, 특별히 “운상이가 왔습니다”에 깨어나신 것은 평소에 목사님이 정 목사를 ‘아들로 생각하신 것이다’로 결론지어, 이씨(李氏) 가문에 정씨(鄭氏)가 아들 되어 아내와 함께 상복이 입혀지고 출상 때에 상여 뒤에 따님, 사위들보다 앞자리(상제자리)에서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삶 자체가 귀감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그 어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며 결정해 왔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봉성 : 이 목사님이 목포에서 목회하실 때, 하루는 최병인이라는 자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그 일대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는데, 그가 그날 설교를 듣고 가더니 다음에 또 올 때 친구를 데려오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리고 설교 후 결신 초청시에 본인 스스로 앞으로 나왔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집사가 되었고, 교회를 지을 때 자기 집을 내놓기까지(이것이 동명교회의 시작) 헌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목회는 사람을 바꾸어놓는 목회였습니다.


송기식 : 수원교회가 한참 부흥 중이었던 1929년, 이성봉 목사님(당시 전도사)은 활천 1월호 ‘축성탄하신년’(祝聖誕賀新年) 광고란에 교회 광고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교회를 개척한 일꾼들의 명단(33명)이 실려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단 다른 교회 광고에 비해 큰 지면을 차지했고, 시각 효과를 내기 위하여 남자는 한문으로, 여자는 한글로 쓴 것을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목사님은 부활주일에 개척예배를 드렸고, 성탄절에 헌당식을 거행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성탄절은 불신자들도 축절(祝節)인지라 이날에 교회당을 헌당하고, 교단 본부의 내빈들과 동리 주민들까지 초청하여 큰 잔치가 되게 함으로, 전도와 교회홍보의 기회를 삼은 것이죠.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의 부속품을 기부하는 일도 있었으니, 그는 지역사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홍보감각이 있는 목회였습니다.

이봉성 : 제가 개인적으로 목사님께 “목회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목사님이 “돈, 여자, 겸손”이라고 짧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돈과 여자를 멀리하고, 끝까지 겸손한 자가 승리한다는 말씀이겠지요. 반대로 이 부분에서 실패하면 그 동안 쌓아놓은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이 목사님 당신이 스스로 그 얘기에 걸맞는 본이 되어 사셨다는 점입니다.


부흥강사로서

이만신 : 이 목사님이 부흥회 때마다 빼놓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흠과 티와 주름잡힘 없는 수정같이 맑은 마음 예수의 마음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 유명한 기도입니다.


송기식 : 목사님의 부흥 설교를 가만히 보면, 그 핵심은 회개에 있습니다. 이는 그 분의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설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내용뿐 아니라, 천로역정을 주제로 설교하실 때 목사님은 제스처라든가 시청각적인 자료를 총동원하여, 당시 성도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 설교를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운상 : 결혼식장 부흥회도 빼놓을 수 없는 집회였습니다. 1960년 3월 20일 막내따님 의숙 양과 신랑 김동수 군(현 신촌교회 장로, 한국도자기 회장)의 결혼식이 청주 서문교회에서 배문준 목사님 주례로 거행되었는데, 양가 대표 인사시간에 이 목사님이 나오셔서, “바쁘신 중 왕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일단 인사하신 후, 장장 40분 동안 전도 강연을 펼치셨습니다. “아무리 부흥목사님이시지만 딸 결혼식에서 그러시다니 너무 하신 것 아니냐”고 했더니, “물실호기(勿失好機)! 그 충북도지사, 청주시장, 청주 출신 국회의원, 은행가, 기업가 등 수백 명이 내 부흥회에 참석할 기회가 없을 것이고, 나 또한 한 분씩 찾아가 말씀 전할 기회도 없을 것이고 하니, 기회는 바로 이때이다 싶어 그랬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만신 : 그 어르신의 부흥강사로서의 자질을 보면, 첫째 인품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성대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노래도 많이 지으셨습니다. 또 시적인 소질도 있으셨구요. 허사가를 부르실 때 보면, 구구절절 감정이 그렇게 탁월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제스처, 다른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운 부흥사적인 연출 등을 생각해 보면, 목사님은 당시 하나님이 내신 부흥사로 생각됩니다.


이봉성 : 군목시절, 사병 정신교육 시간에 제가 목사님을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장시간에 걸친 설교 후, 목사님은 허사가로 마지막을 장식하셨는데, 그 분의 독특한 제스처와 음성은 모든 장병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더라구요. 목사님은 기회를 놓칠 새라 바로 구원 초청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3,000명이나 되는 모든 장병이 한 손도 아니고 두 손을 번쩍 들더군요. 그 때 그 감동적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송기식 : 가는 곳마다 그렇게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성봉 목사님이 신비주의로 가지 않은 것은 또 하나의 대단한 면모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높아지다 보면 교만해지기 십상인데 말입니다.


사회 : 장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활 천 / 2000년 7월호 / (통권 제560호) / 발행일/2000.7.1

연구논문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
9.
이성봉의 성서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좌 담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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